[피플@비즈] "대목 앞두고 가게 내놨다면 말 다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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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거 안 하면 뭐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요. 그러니 적자를 보더라도 그냥 장사하는 거죠."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25년째 아동의류를 팔고 있는 이용운(51.사진) 사장. 12일 시장에서 만난 그에게 추석경기를 묻자 "추석이면 뭐 번쩍 번쩍하고 신나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점포가 속한 포키 아동복 상가 운영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 사장은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모두 장사가 안 된다고 아우성"이라며 "올해는 추석 대목을 노리고 상인들이 돈을 모아 4600만원어치의 경품을 마련했는데 절반 넘게 남아 있다"고 답답해 했다. 한 평가량 크기의 점포 198개가 들어선 포키아동복 상가는 지난달 15일부터 한 달 동안 물품 구매자에게 금액에 따라 믹서기와 도시락용기세트 등을 나눠주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15일에는 추첨을 통해 5명에게 대형냉장고, 10명에게 드럼세탁기를 줄 계획이다. 그러나 3000개를 준비한 도시락용기세트는 12일 현재 2500개가 남아있다고 했다. 도시락용기세트는 포키 상가에서 구매한 물건의 총액이 300만원 이상 되는 고객에게 주는 사은품이다. "사은품을 너무 많이 준비한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포키는 중소상인을 대상으로 하는 도매상가로 300만원어치 구매는 기본이며 예년 수준으로 기대하고 준비한 것"이라고 말했다.

"월 30만원씩 내야 하는 상품 보관 창고 비용을 걱정할 지경입니다. 우리 상가뿐 아니라 다른 아동복 상가들도 장사가 죽을 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장은 "전국 아동복 물량의 80% 가량을 공급하는 남대문 아동복 상가가 이렇게 장사가 안 된다는 것은 적어도 아동의류에 관한 한 올해 추석 경기는 실종됐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남대문 아동복상가는 서울.수도권뿐 아니라 대구 등 전국 각지의 아동 의류상인들이 물건을 사러 오는 곳인데 여기서 물건이 안 팔린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판매가 부진한 것을 보여준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 사장은 포키 상가에서 7~9월 사이에 13개 가게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는 "추석은 장사꾼에게 최고의 대목인데 추석을 앞두고 가게를 내놓는다는 것은 웬만큼 불황이 아니고는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라고 했다.

이 사장이 운영하는 가게도 한 달 매출이 1000만원 수준으로 예년과 비교하면 40% 가량 줄어든 것이라고 했다. 그나마 물건 만드는 공장과 가게를 자신이 소유하고 있기에 임대료가 나가지 않아 부담이 적은 편이라는 것이다. 월 100만원 가량의 임대료를 내는 점포 운영자의 경우 허리가 휘고 있다고 했다. 이 사장은 "1000만원 매출이라지만 재료비에 공장.가게 운영비, 인건비를 제하면 오히려 적자"라며 "그나마 밤에 와서 일해주는 아내 덕에 한 사람 인건비는 줄이고 있다"고 했다.

"언제 추석 경기가 가장 좋았느냐"고 묻자 그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참 신나게 일했다"고 했다.

이 사장은 요즘 공장(종로구 숭인동) 인근의 이웃들에게 자신이 만든 옷을 나눠줄 때 나오는 반응을 보면서 '경기가 어렵구나, 중산층이 줄어드는구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2~3년 전에는 옷가지를 주면 반응이 시큰둥했는데 요즘엔 "정말 고맙게 잘 입겠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옷 사입기 어려운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졌음을 반증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글=염태정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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