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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영조와 부시의 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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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태풍의 피해는 예나 지금이나 막대하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재위(52년)했던 영조의 '실록'에서 피해 규모가 밝혀진 경우를 몇 가지 들어본다.

영조 15년 7월 황해도 해주 등 7개 고을에 홍수가 나서 300명이 사망, 가옥 600호가 유실되었다. 17년에는 홍수가 전국을 휩쓴다. 호남은 7월에 800여 호가 유실되고, 다시 9월에 770호가 유실된다. 같은 9월에 관동에서는 1000여 호가 유실되었다. 홍수 뒤 전염병이 발생하여 관서 지방에서 3700여 명이 사망한다. 28년 6월에 경기도에서 홍수로 33명이 압사하고 219호가 유실되고, 30년 7월에는 관서 지방에서 400여 호가 유실되었다. 32년 8월에는 영남의 평해(平海) 등 지방에 죽은 사람이 206명, 유실된 집이 381호였다. 이상은 피해 수치가 명기되어 있는 기록이다. 수치가 없는 기록까지 합치면 홍수 피해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홍수는 6월에서 9월 사이에 발생하고 있는데, 양력으로 치면 7, 8, 9, 10월이다. 태풍이 불어오는 계절인 것이다.

영조는 즉위 4년째인 무신년 여름 새벽 빗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 내가 덕이 부족하여 4년 동안 홍수와 가뭄, 기근이 들었고, 올해는 고금에 없던 역적의 난리(李麟佐의 亂)까지 겪었으니, 가엾은 나의 백성들이 어떻게 견디겠는가? 옛말에 '전쟁 뒤에는 꼭 흉년이 든다' 했는데, 다행하게도 최근 2년 동안은 큰 흉년이 들지 않아 농사에 희망이 있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가을이 아직 먼데, 중간에 홍수와 가뭄이 들 것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추수철이 다 되어 가는데, 찬비가 내려 장마가 질 줄 누가 안단 말인가. 내가 부덕하여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해 이런 흉한 일을 불러올지도 모르겠다. 만약 스스로 반성하고 힘쓰는 일이 없다면, 어떻게 하늘을 감동시키랴. 마땅히 내 몸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영조실록' 4년 7월 27일)

비가 가을 농사를 망치고 백성이 굶주릴 것이 걱정스럽다. 영조는 공물을 감면하고 감선(減膳)하라 명한다. 수라에 오르는 찬의 가짓수를 줄이는 감선은 굶주리는 백성들을 생각한 조치였다. 태풍.홍수로 피해가 발생하면, 왕은 죽은 이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부역을 면제하고 세금을 감면하였다. 이것은 다분히 형식적인 관례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조의 경우는 진심이 엿보인다. 영조는 25년이 지난 뒤 어느 날 새벽 계속 비가 내리자, 지난 무신년(영조 4년)의 감선을 떠올린다. "아! 홍수와 가뭄은 참으로 내가 덕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내 무신년보다 늙었다만, 백성을 위하는 마음과 스스로 힘쓰는 뜻이야 어찌 줄어들었으랴?"('영조실록'29년 7월 23일) 영조는 다시 감선을 명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을 강타했다. 대통령 부시가 무성의한 대응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논어' '안연장(顔淵章)'이 떠오른다. 정치의 도리를 묻는 자공(子貢)에게 공자는 "양식과 군대가 넉넉하면 백성들이 믿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공이 셋 중 버려야 할 것을 묻자 공자는 군대라고 답한다. 다시 나머지 둘 중 버려야 할 것을 묻자 양식이라 답한다. "예부터 사람이란 다 죽는 존재다. 하지만 사람은 신의가 없으면 사람이 될 수가 없다(民無信不立)." 부시는 이라크 전쟁에 돈을 붓고 있다. 하지만 제 나라 백성은 물에 빠져 죽는다. 그의 지지율이 떨어진 것은 신의를 잃어버린 증거다. 빗소리에 새벽잠을 깨어 홍수와 가뭄이 모두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 말했던 영조는 부시에 비하면 얼마나 훌륭한가. 강대국은 그 무력이 두려운 존재이지 존경할 도덕적 존재는 아닌 것이다.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