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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자유당과 내각(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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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국회가 추진하던 장면총리의 대통령추대공작과 내각책임제개헌이란 두개의 카드는 이대통령과 국회의 대결을 거칠게 만들었다. 장면총리가 정부의 훈령에 따라 귀국하던 때는 개헌논의가 다시 불붙기 시작했던 때다.『국회가 직선제 개현안을 재론해 통과시킨다면 금년의 대통령선거는 국회에서 하는데 협동하겠다』 는 이대통령의 태도 변화는 국회와의 타협의 신호였다.

<개헌,다시불붙어>
그 무렵 협상은 허정총리서리가 나서서 추진하고 있었다.
이런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원내 자유당파가 비밀리에 장면총리의 대통령 추대공작을한 것 때문이다.허정씨의 회고.『나는 이박사가 국회에 대한 태도를 부드럽게 고치고 국회도 이박사를 다시 대통령으로 뽑아 전쟁을 수행한다는 선에서 타협하도록 주선했다. 그래서 먼저 이박사에게 <선생님,개헌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 보다는 국회에서 원만히 재선되시도록 국회의원들의 등을 좀 두드려 주십시오.그사람들도 10만선량이라는 자부심이 있는데 그동안 선생님이 그들을 너무 무시해 왔지 않습니까.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국회의원들을 무마하십시오.선생님이 묵인하신다면 제가 나서서 타협이 이루어지도록 힘써 보겠습니다.>그러고는 한민당을 같이하던 몇사람을 만나 그들의 뜻을 넌지시 떠봤다. 나는 그들에게 <설령 이대통령에게 잘못이 있다해도 지금은 전시가 아닌가.전란중에 정권을 교체하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고려해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이대통령의 재선결의가 만만치 않으니 이박사를 꺾기는 힘들다.이대통령에게도 다 계획이 있으니 잘못하다가는 당신들만 손해를 볼 것이다>라고 설득했다.
그들의 태도로 미뤄보아 타협의 가능성이 짙다는 인상을 받았다.그런데 이같은 막후 절충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일부 국회의원들이 은밀히 본회의를 성립시키고 전격적으로 장면씨를 대통령으로 선출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다.물론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대통령이이 소문을 알게된 것이 타협의 길을 막고 말았다.』
대통령은 국회의 이런 비밀공작에 자극돼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대통령의 강경으로의 선회는 총리교체로 나타났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장석윤씨의 회고.
『장총리는 유엔총회가 끝나고도 두달이 지난 52년4월에야 돌아왔다. 외무부의 귀국훈령에도 반응이 없어 국무회의에서 장총리의 조속한 귀국을 결의해 하와이로 전문을 띄워서야돌아온 것이다. 그는 이미 국회내 정파들과 연락하면서 대통령선거공작을 하고 있었다.그랬기 매문에 귀국한 직후 신변안전을 염려해 곧장 거처를 미군병원으로 숨겨버린 것이다. 그런 어느날인데 서울 경무대의 이대통령이 장면총리의 사표를 받아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그때 정부는 환도하지 않고 있었지만 대통령은 수복된 서울에 가서 오래 머물던 때였다.이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경찰을 통해 총리의 거처를 수소문했으나 알아낼수 없었다.

<허정이 중재나서>
그래서 선정 총리비서실장을 찾아갔다 극비로하고 나 혼자만 잠시 만날테니 안내를 해달라고 청했다.
이렇게 해서 부산 초량동에 있던 미군병원에 가서 장총리를 만났다.대통령의 말을 전했더니 내무장관을 못믿는 것은 아니지만 무슨 증표라도 있어야하지 않겠느냐고 했다.이래서 다시 경무대로 연락했더니 대통령이 서한을 보내주었다.장총리에게 대통령의 서한을 전했더니 곧바로 총리직 사표를썼다.』
장총리의 대통령선거 공작은 51년말부터였다. 김성수부통령의 비서실장이던 신도성씨의 회고가 이를 말해준다.
『51년말부터 국회에선 내각책임제 개헌추진이 은밀히 계획되어 엄상섭의원과 내가 개헌안 기초를 하고 있을 때다. 하루는 총리실에서 부른다기에 갔었다.장총리는 내각책임제 개헌은 꼭 해야하느냐면서 인촌(김성수아호)에게 말씀드려 내각책임제 개헌 계획은 철회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했더니,우리가 집권하면 대통령중심제가 더욱 낫다는 얘기였다.나는<선생님,그건 안됩니다.여 야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정책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했더니,정세가 달라지면 정책도 변해야하는것 아니냐고 했다.

<국민당생각 달라>
내가 돌아와 인촌에게 장총리얘기를 전했더니<그사람 능히 그럴 사람이지>라고 못마땅해했다.그때 국민당으로선 이박사의 지나친 행정독단을 막기위해 내각책임제개헌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그러니 자연 다른 정파와 손을 잡아야 했고 그때문에 이들 원내정파가 내세운 장면씨의 대통령추대를 양해한 것이지 대통령중심제에서 장면에게 정권을 맡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원내의 장면계 정파들도 대표가 없어 장면을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으로 내세우려 한 것이지 실권있는 행정수반으로서는 아니었다.
이런 두사람의 증언이 말하듯 장총리의 귀국지연은 대통령선거공작 때문이었다.그리고 그같은 장면총리의 태도를 정파의 장난질이라해서 이박사에게 심한 충격을 주게 되 것이다.
이대통령이 장면을 총리로 기용한 것은 국회와의 타협을 위해서였다. 국회는 50년9월에 이어 11윌엔 내각총사퇴 결의안을 내놓고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그때는 북상했던 전선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으로 밀리고 있던 때였다.
이대통령은 전쟁수행을 위해 이때도 국회의 압력에 굴복해 두번째로 내놓았던 백낙준인준요청을 철회하고 국회 인준이 가능한 장면주미대사를 총리로 지명했다.
대통령은 국회의 뜻에 맞는 총리를 임명하고 국회는 내각총사퇴 공세를 철회한다는 타협의 결과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임명된 총리여서 그의 역할은 국회관계 조정이 추가됐다. 장총리는 국회의원 자택을 방문하는등 의원들과 빈번하게 접촉했다.그때도 국회와 정부사이엔 마찰이 끊이지 않았지만 장총리의 로비활동으로 고비를 넘기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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