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가-인하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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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저자」유행시대다. 저물가·저금리·저배당·저환율….
특히 저물가에 대한 정부의 노력은 총력전이라고 할만하다. 모든 경제정책이 여기에 수렴되고 있다. 해방이후의 뿌리깊은 인플레마인드를 박멸하기 위해서도 웬만한 회생쯤은 감수해야 한다는 각오들이다.
국내 기름값을 앞당겨 내린 것도 그런 의지에서다. 이런 참에 중동산유국들이 원유값을 조만간 상당수준 떨어뜨릴 전망이다.
저물가정책에 여간 희소식이 아니다. 당연히 국내기름값이 떨어질 테고 따라서 공산품값들도 내릴 수 있게 된다. 「저자」시대가 아니라 「인하」시대도 기대해봄직하다.
그래서 나온 말이 『유가여, 제발 내려주소서』라고 한다. 경제관료들 사이에 요즘 유행되고 있는 「기도문」이다.
기도를 할 땐 잡념이 없다. 소원하는 일 말고 딴 일은 일체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눈까지 감지 않는가.
그러나 경제관료들의 이처럼 순직한 태도는 곰곰 따져볼 문제다.
자칫 외곬 정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벌써 그런 징후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있다. 「저자」정책방향에 어긋나는 것은 아예 말도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다. 물가·금리는 물론이요, 최근에는 기업들의 배당에까지 그 입김이 쐬어지고 있다.
어딘가 경화되어가고 있는 낌새를 지울 수 없다.
자연히 정책의 다른 한 면인 부작용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질 수 밖에 없다.
예컨대 저금리를 외면한 뭉치돈이 부동산투기를 일으키고 있다든지, 배당률을 억제함에 따라 증권시장을 위축시킨다든지, 국내물가 안정을 위한 수입개방으로 국제수지에 부담을 가중시킨다든지, 강화되고 있는 품목별 가격관리가 그 동안 강조해온 시장기능의 자율화정책에 배치된다든지….
그럼에도 당국자들은 정책의 다각성이나 포괄성보다는 시종 적극성·과감성을 내세우고 있다. 예시한 문제들이 별 대수롭지 않다는 판단에서인지, 아니면 이것저것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식의 논리에서인지.
어쨌든 저물가정책이 강조된 나머지「물가만 잡으면 된다」의 생각이 너무 팽배해 있다. 기름값문제만 해도 그렇다. 국제원유값 하락현상을 국내물가의 하락요인으로만 파악하고 있을 뿐, 그에 따른 다른 역반응들에 대해서는 별 무관심이다.
국제금융시장이 북새통이고 선진각국들도 유가인하에 대한 시비·논란을 한참 벌이고 있는데도 말이다.
비싼 댓가를 치르고 짜놓았던 석유가체제의 경제 구조를 허물고 이젠 저유가체제로 바꿔 나가야하는 까닭이다. 심지어 제3의 오일쇼크라는 말까지도 나온다.
중동진출의 비중이 큰 우리경제로서는 유가하락에 따른 양면성이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다.
원유값 인하로 그저 국내물가가 내린다고 좋아만 할 것이 아니라 경제구조자체에 대한 변화를 예견하고 그에 따른 근본대책을 신중히 모색해야 할 때다.
최소한 전철은 밟지 말아야한다. 76년, 77년 오일달러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성취했던 경상수지흑자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었고 당시의 정책태도가 어떠했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제2차 오일쇼크를 당할 때도 선진각국이 서둘러 대책을 마련하고 있을 때 우리는 고추·마늘값을 놓고서 나라전체가 온통 북새통을 치르지 않았던가. <이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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