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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밥벌이' 가 전부는 아니잖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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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김혜미
사회부문 기자

“뭐 얼굴을 깠다고(공개했다고)?” 당연히 ‘모자이크’와 함께 등장할 줄 알았다. ‘땅콩 회항’ 대한항공 박창진 사무장 얘기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 그는 언론에 등장해 대놓고 오너의 잘못을 말했다. 그냥 ‘박모(41) 사무장’이라고 하면 되지 않았을까. 남들처럼 목소리와 얼굴에 ‘변조’ 효과만 입혔던들 회사를 옮기더라도 일을 계속할 수 있을 텐데….

 직장인이 자기를 드러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취재를 해보면 안다. 이제 막 대리가 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육아휴직에 관한 생각을 물은 적이 있다. “남성에게 3개월의 출산휴가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친구는 ‘실명 공개’ 앞에서 무너졌다. 그는 결국 널리고 널린 ‘서울 마포구에 사는 김모(31) 대리’를 자처했다. “알잖냐. 내가 뭔 힘이 있겠니. 회사에서 조금이라도 밉보이면….”

 박 사무장의 행동을 다시 곱씹었다. 처음 TV에 등장한 그를 보고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결혼은 했나?’ 그의 준수한 외모 때문(만)이 아니다. 연이어 든 생각은 더했다. ‘집이 엄청 잘 사나?’ 내심 “처자식이 없고 물려받은 재산이 많아 직장생활을 안 해도 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 탓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몇 천만원씩 뛰는 전셋값과 쇼핑하느라 긁은 카드값에 호흡이 가쁘다. 온 사방에 “오후 6시 ‘칼퇴’ 하겠습니다”라는 말 한 번 꺼내보지 못한 소심한 ‘미생’들이 차고 넘친다. 내가 박 사무장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행동할 수 있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이런 마음을 알아챈 걸까. 박 사무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모도 계시고 내가 부양해야 할 가족들을 생각했을 때 ‘나의 호기와 잠깐의 자존심이 뭐가 중요하냐’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가진 걸 잃더라도 존엄함은 지킬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고.

 우리가 ‘밥벌이’란 말에 유독 약한 탓일까. 물불 안 가리고 충성한 대한항공 임직원을 이해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월급쟁이가 별 수 있겠느냐”는 식의 얘기다. “경기부양에 적극 나서라는 차원에서 기업인들의 사면·가석방이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별로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뭔가 석연찮다. 우리 사회에 다른 걸 지키기 위해 밥을 버리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얼마 전 송년회 자리. 아직 미혼인 친구에게 소개팅을 주선하겠다며 이상형을 물었다. “지하철에서 아주머니들이 나눠주는 전단지를 챙겨 받는 사람”이란다. 엉뚱한 답이지만 알 것 같았다. 새해에는 아무리 밥벌이가 바쁘더라도 이 정도 곁은 내어봐야겠다. 세상에는 밥 말고도 챙길 게 많다.

글=김혜미 사회부문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