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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규의 '한국미술 명작선'] ③수수께끼의 겨울나그네, 함윤덕의 '기려도'

중앙일보

입력

함윤덕, 기려도(騎驢圖), 견본담채, 15.6×19.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전기의 산수화는 화면이 어두운 편입니다. 채색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데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바탕 종이나 비단이 변색됐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이채를 띠는 그림이 이 '기려도'입니다. 어딘가 산길을 가는 나귀 탄 인물의 다홍색 도포가 더없이 화사해 눈길을 끕니다.

화려한 이 도포만 봐서는 바야흐로 봄인가 싶지만 그게 아닙니다. 이 선비는 챙이 넓은 쓰개 아래에 어깨까지 덮이는 풍차(風遮)를 받쳐 썼습니다. 그러고 보면 도포 아랫자락도 무언가 덧댄 듯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귀를 타고 가는 이 선비의 긴 턱수염이 심상치 않습니다. 바람에 휘날린 듯 앞이 많이 치켜 올라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비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합니다. 살짝 화면 쪽으로 얼굴을 보인 선비는 입을 다문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듯합니다.

무심해 보이는 인물과 달리 나귀는 고개를 떨 군 채 힘에 겨운 모습입니다. 힘을 내 앞발을 뻗어 보지만 뒷발은 엉거주춤한 그대로입니다. 이런 인상을 받는 것은 나귀 표현이 매우 정교한 때문입니다. 커다란 귀는 물론 갈기 그리고 꼬리에 걸어 안장을 지탱해주는 밀치와 밀치끈도 보이는 그대로 꼼꼼하게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런 정도라면 인물은 물론 동물 묘사에도 탁월한 솜씨라고 하겠지만 함윤덕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나 호도 모릅니다. 기록이라고는 훗날 윤두서가 ‘구도와 선염이 화원 중에 단연 뛰어나다’고 한 것이 전부입니다. 선염은 물기 있는 곳에 먹을 써서 번지게 하는 기법입니다. 이 글 속에 ‘화원’이란 말이 있어 화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림으로 전하는 것은 거의 드뭅니다. 이외에 그가 그렸다고 하는 전칭작(傳稱作) 산수화 3점이 더 있기는 합니다.

따라서 이처럼 자료가 적은 화가 그림에 대한 접근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작품은 화풍이나 구도로 접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그림에 대해 일찍이 안휘준 교수는 유명한 강희안(1417∼64)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와 구도는 물론 표현에도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보면 강희안 그림의 좌우를 뒤집어놓은 듯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희안, 고사관수도, 지본수묵, 23.4×15.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넝쿨이 늘어진 돌출한 벼랑과 그 아래 인물이 크게 배치된 점이 비슷합니다. 또 짙은 먹을 써서 벼랑을 거칠게 표현한 절파계 화풍이 보이는 것도 닮은 데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그림은 16세기에 들어 조선에서 본격화되는 절파계 화풍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분류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고귀하게 보이는 다홍색 도포의 선비는 왜 당나귀를 타고 추운 겨울 길을 나선 것일까요. 옛 그림은 흔히 유명한 고사나 일화를 전제로 그려진 것이 많습니다. 나귀 탄 인물 역시 고사에서 그림 소재로 굳어진 것 중 하나입니다. 나귀에 탄 사람은 다름 아닌 시인입니다.

그림 속으로 들어온 나귀에 탄 시인은 대개 당나라 시인 세 사람으로 집약됩니다. 우선 제일 유명한 사람이 맹호연(孟浩然)입니다. 그는 출세와 무관하게 세상을 떠돌며 불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른 봄 잔설이 녹기도 전해 당시 수도였던 장안 교외의 파교를 건너 매화를 보러갔다는 이른바 풍류 넘치는 ‘파교심매(?橋深梅)’라는 일화를 남겼습니다.(18세기 심사정이 이를 테마로 그린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시성이라 일컫는 두보(杜甫)입니다. 두보도 일생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그 중 50세 넘어 잠깐 성도 근처에 완화 계곡에 살 무렵만이 태풍 속의 평온처럼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때 그는 평화로운 봄날을 즐기면서 술에 취하면 나귀를 거꾸로 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완화취귀(浣花醉歸)’ 고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계(鄭?, ?∼899)가 있습니다. 그 역시 당나라 말기 재상을 지낸 정치가이자 시인입니다. 언제고 그렇듯이 권력자 주변에는 아첨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아첨꾼이 시인 재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요즘 시는 어떻습니까’ 라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는 ‘정사가 바쁜데 무슨 시가 되겠는가’ 라고 핀잔을 주면서 ‘시상이란 눈보라 휘날리는 파교에 나귀 등에 올라타고 있을 때 가장 잘 떠오른다’고 한마디 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재파교풍설중여배상(在?橋風雪中驢背上)’ 고사입니다.

고사를 이렇게 늘어놓고 보면 나귀가 가고 있는 길이 눈 덮인 다리 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옅은 먹으로 칠해 배경은 눈 내리는 경치를 나타낸 것입니다. 오른쪽 좁다랗게 보이는 곳은 눈 덮인 다리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붉은색 복장이 예부터 관료를 나타냈던 색이란 점을 고려하면 나귀 위 주인공도 단순한 겨울 나그네가 아니라 시상에 골몰하는 시인 재상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화원제도

함윤덕은 조선 중기에 활동한 화원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름 석 자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화원은 조선시대에 함윤덕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기록이 왕과 사대부 중심이란 점도 있지만 화원을 그 자체를 매우 낮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신분이 낮은 만큼 생활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고려를 무혈 제압한 조선은 초기에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화원제도 역시 고려를 계승해 도화원을 두었습니다. 성종 때 조선식 관제가 완성되면서 도화서로 개편됐습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도화서 화원의 정원은 20명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나 보직이 정해진 인원은 5명뿐입니다. 나머지는 말하자면 임시직으로 그때그때 임무에 따라 점심값 정도의 수당만 받았습니다. 따라서 생활고가 적지 않았는데 감당해야 할 임무는 매우 많습니다.

화원의 주요 업무는 어진 제작과 궁중 행사에 뒤따르는 의궤 제작이었습니다. 그외에 왕의 수양에 필요한 감계화(鑑戒畵), 경직도 등의 제작이 있습니다. 또 연말에 신하에게 나눠주는 세화를 수십 장씩 그려야 했고, 지도와 불화 등도 그려야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감상화도 그렸는데 당연히 이 숫자는 많을 수가 없습니다. 화원이면서도 남긴 그림이 적은 이유는 화원이 처했던 이와 같은 환경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글=윤철규 한국미술정보개발원 대표 ygado2@naver.com

한국미술정보개발원(koreanart21.com) 대표. 중앙일보 미술전문기자로 일하다 일본 가쿠슈인(學習院) 대학 박사과정에서 회화사를 전공했다. 서울옥션 대표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했다. 저서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 역서 『완역-청조문화동전의 연구: 추사 김정희 연구』 『이탈리아, 그랜드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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