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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건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것부터 먼저 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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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24일 친서를 보냈다. 김 위원장은 친서에서 현 회장과 이 여사에게 내년 방북을 제안했다. 이날 개성공단에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겸 비서(오른쪽)가 현 회장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있다. 왼쪽부터 현 회장, 조건식 현대아산 사장, 백천호 현대아산 부장, 맹경일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김 통일전선부장 겸 비서(아태위원장). [사진 현대그룹]
24일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보낸 친서(위)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게 보낸 친서. [뉴시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친서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하지만 남북관계 개선을 필요로 한다는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비서의 메시지는 곱씹어볼 만했다. 대북전단 문제를 빌미로 북한이 고위급 회담을 거부하는 바람에 남북 당국 간 대화는 꼬일 대로 꼬였고,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채 한 해를 보내고 있어서다.

 24일 김정은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게 오전 11시와 오후 2시에 각각 친서 형태의 조문 답신을 보냈다. 지난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주기 때 조화를 보낸 데 대한 감사 표시다. 이 여사에게 보낸 2쪽짜리 서한에서 김정은은 이 여사 측이 조화와 조의문을 보낸 데 대해 사의를 표하고 “민족의 통일 숙원을 이룩하기 위해 앞으로도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정은 회장에게 보낸 친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겼으며 “현대의 사업에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는 정도가 추가됐다고 한다.

 당초 대남담당인 김양건 비서가 개성공단을 방문하기로 함에 따라 북한이 남북관계와 관련한 모종의 입장을 남측에 전달하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됐다. 이미 조화를 전달할 때 원동연 통전부 부부장이 사의를 표한 바 있는데 북한이 재차 감사의 뜻을 전하겠다며 김양건을 파견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의 친서에는 의례적인 문구 외에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정부 당국자는 “남북 당국 간 대화 등과 관련한 구두 메시지도 없었고 그럴 성격의 자리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북한으로선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이 여사 등에게 각별한 예의를 표한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친서 전달이란 이벤트를 만든 데 불과했다는 얘기다. 실제 김양건은 공단 내 회의실에서 기립한 자세에서 친서를 읽고 이를 전달했다. 김정은을 이른바 ‘최고존엄’으로 챙기고 있음을 남측에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깔렸다고 정부 당국자는 전했다. 정부가 김대중평화센터 측을 대표해 개성에 가려던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방북 신청을 불허한 것도 이런 과정에 휘말려 논란이 증폭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반면 친서와 별개로 김양건 비서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먼저 김성재 전 문화부 장관이 “내년에 6·15 선언 15돌이 되니까 남북한이 행사를 한번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김양건은 대답 대신 미소를 띤 뒤 “쉬운 것부터 먼저 하자. 금강산 관광이라든지, 이산가족 상봉 등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것들을 먼저 시작하자”며 “소로(小路·작은 길)에서 시작해서 대통로로 나가자”고 말했다. 말 그대로라면 남북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있음을 비친 셈이다. 북한이 이산상봉 카드로 5·24 조치 폐지 등을 요구할 가능성도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에 김 전 장관은 “박근혜 대통령도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강한 의지가 있다”고 김양건에게 전했다고 한다. 특히 개성공단 북측 여성 근로자 모자(母子) 보건사업 등에 대해 북측과 다시 만나 협의하자고 했더니 김양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고도 전했다. 김 전 장관은 지난 10월 말 이희호 여사와 함께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만난 일이 있다.

 하지만 일부에선 김양건의 언급이 구체적인 관계 진전을 염두에 뒀다기보다는 분위기 탐색 수준이었다고도 보고 있다. 실제로 현정은 회장은 “김양건 비서는 금강산 관광 문제 등이 새해에는 잘 풀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며 “덕담 수준의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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