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60돌, 14일부터 특별정상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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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창설 60돌을 맞아 '빈곤 퇴치와 유엔 개혁'을 주제로 한 특별 정상회의가 14일부터 유엔본부에서 열린다. 이번 정상회의는 170여 개국 정상이 참가하는 역대 최대 규모다. 환갑을 맞은 유엔의 앞날을 총체적으로 점검하자는 취지다. 회의는 특히 '이라크 석유-식량 프로그램' 등 유엔을 둘러싼 각종 부패.비리 스캔들이 잇따라 터져나오는 가운데 열리는 만큼 국제사회가 유엔 개혁을 위해 어떤 처방을 내놓을지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 "말 잔치" vs "개혁 위한 첫발"=정상회의는 세계 각국의 공통 관심사를 두루 다룬다. 논란이 되는 7대 의제는 ▶빈곤 퇴치 ▶인권 신장 ▶반(反)테러 ▶인종 청소 방지 ▶군축과 핵 비확산 ▶분쟁국가 재건 지원, 그리고 유엔 자체 개혁이다. 앞의 6개 의제가 유엔의 활동 방향을 가늠하는 기준이라면 유엔 개혁은 이 같은 활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구조 개혁이다.

각국 정상은 14~16일 사흘간 뉴욕 유엔본부에 모여 각국의 기조연설을 듣게 된다. 중간 중간엔 소그룹 회의도 열린다.

첫날 라운드 테이블은 2000년 밀레니엄 정상회의 때 합의했던 '새천년 개발 계획'의 세부 이행 사항을 점검하기 위한 자리다. 빈곤 퇴치와 분쟁국가 지원 등 인도주의적 화두들을 다루게 된다. 마지막 날에는 정상회의 선언문을 채택할 예정이다. 그러나 유엔이 제안한 선언문에 대해 미국이 뒤늦게 이견을 내놓아 최종 문안이 조율되지 못하고 있다. 회원국을 대표하는 32개 핵심 국가 대표가 주말까지 협상을 계속하고 있다.

이견의 폭이 쉽게 좁혀지지 않아 정상회담의 성과에 대한 회의적 전망이 적지 않다. 물론 일부에선 "뭔가 의미 있는 진전이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다. 실무 책임자급 회담 수준을 뛰어넘어 각국 정상이 한데 모이는 자리인 만큼 어떻게든 책임 있는 실천 방안이 제시될 것이란 논리다.

그럼에도 유엔본부 주변에는 '현실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중국.유럽연합(EU) 등 강대국 간의 미묘한 주도권 다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상호 비난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둘러싼 지리적 인접국 간의 감정적 갈등 등이 난마처럼 얽혀 결코 생산적인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다.

참가국 모두가 총론에서는 한목소리를 내겠지만 개도국 원조나 유엔 개혁 등 세부 사항에 들어가면 첨예하게 의견이 엇갈리기 쉽다. "말의 성찬에 그칠 것"이란 냉소적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엔의 태생적 한계가 이번 정상회의에서도 여실히 드러날 것이란 설명이다.

◆ "일방주의" vs "발목 잡기"=이 같은 비관적 전망의 밑바닥에는 미국과 유엔 간의 힘겨루기라는, 60년을 이어온 본질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유엔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고 불만이 가득하다. '유엔'이란 단어엔 EU와 중국.러시아 등이 모두 포함돼 있다. 냉전 시대에는 소련과의 첨예한 주도권 다툼 속에서 '유엔 무용론'이 팽배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 내 보수파 지도자들은 "유엔은 선진국 돈을 긁어모아 공산주의자들만 돕는 조직"이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미국은 특히 2003년 유엔이 이라크전을 끝까지 반대한 데 대해 서운함을 감추지 않고 있다. 미국은 이번엔 '유엔 개조론'을 들고 나왔다. 유엔의 최대 주주이자 최강국으로 자신의 이해에 맞춰 유엔을 구조조정하겠다는 의지다. EU 국가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선두주자격인 존 볼턴을 유엔 주재 미국대사에 임명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이 같은 미국의 일방주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특히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미국의 독주가 도를 넘고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의 일방주의에 반대하는 대부분의 국가는 유엔에 힘을 실어주고자 한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을 '석유-식량 프로그램' 스캔들에 연루됐다며 몰아내려 하자 나머지 국가가 아난 총장 지지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의 맹방인 영국 잭 스트로 외무장관까지 8일 석유-식량 프로그램 비리 조사 결과와 관련 "스캔들의 주범은 사담 후세인이지, 아난 총장이 아니다"며 옹호했다.

이와 관련,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8일 "미국은 유엔 흠잡기에만 열중할 게 아니라 효율적인 유엔 만들기에 앞장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독주가 결국엔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부메랑이 될 것이란 경고인 셈이다. FT는 "미국은 좀 더 겸손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서울=박신홍 기자

팽팽한 안보리 상임국 확대안
G4 "6개국 늘려 11개로"
미국 "일본 포함 2개국만"

유엔 개혁안의 핵심인 안보리 확대 문제가 이번 총회에서 매듭지어질 수 있을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미국의 반대가 심하기 때문이다. 안보리 확대의 기본 취지에는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견제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을 미국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상임이사국 진출을 끈질기게 시도해 온 G4(일본.독일.인도.브라질) 국가들은 지난달 초 아프리카연합(AU)과의 확대안 단일화 협상에 실패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3월 안보리 개혁안 두 가지를 각국에 제안했다. 상임이사국을 6개국 더 늘리는 A안과 거부권을 갖지 않는 준상임이사국 8개국을 새로 만드는 B안이다. G4안은 A안과 비슷하다. 현재 5개인 상임이사국을 11개로, 10개인 비상임이사국을 14개로 늘리자는 것이다. G4는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신규 상임이사국은 향후 15년간 거부권을 갖지 않겠다"는 단서 조항도 달았다. 일본과 독일은 각각 유엔 재정분담금 순위 2위(19.5%)와 3위(8.7%)를 차지하고 있다. 기여하는 만큼 권리도 인정받겠다는 얘기다.

그러나 미국은 6월 일본을 포함한 상임이사국 2개, 비상임이사국 3개를 늘린다는 내용의 독자안을 내놨다. 어떻게든 대폭 확대를 막아보자는 것이다. 또 정상회의에서 채택될 예정이었던 공동선언문에 지난달 존 볼턴 유엔 주재 미 대사가 딴죽을 걸었다. 전체 39쪽짜리 공동선언문을 750군데나 수정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견을 좁히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전망이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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