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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난 송년회 분위기메이커 … 올해는 영 기분이 안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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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연말에 많은 ‘우울한 유쾌한씨’

Q (뭐든 인정받고 싶은 워킹맘) 늘 바쁘지만 특히 12월은 너무 바쁩니다. 송년회 때문이죠. 네크워킹을 좀 넓게 하거든요. 초중고에 대학 동창회부터 와인·골프 동아리까지 다양합니다. 말 주변이 좋고 유머감각이 있어 모임의 사회를 볼 때도 많습니다. 그러니 속한 모임에서는 늘 초대 1순위죠. 지금까지는 은근히 인기를 즐겨왔고 12월이 항상 유쾌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좀 이상합니다. 재밌게 송년회를 마쳤는데 허무하고 우울하니 말입니다. 나이 탓인가요.

A (분위기 잘 맞추는 윤 교수) 연말이면 우울하고 허무하다며 클리닉에 찾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다들 재미있게 노는 와중에 혼자 쓸쓸히 보내는 사람이 병원에 올 것 같은데 현실 속에선 거꾸로 송년 모임에 치어 정신없이 보내는 사람이 더 많이 찾아 옵니다.

 ‘우울’의 반대말을 물으면 ‘행복’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울하면 행복하지 않다고 여긴다는 거죠. 또 행복을 필수로 여기는 행복강박 시대에 살다 보니 ‘기분 전환’ 이라는 강력한 심리 조정법을 지나치게 많이 씁니다. 기분 전환이라는 말은 가볍고 산뜻한 느낌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우울·허무 같은 부정적 감정을 긍정적 감정으로 바꿔 버리겠다는 강력한 마음 통제 기술입니다. 순간적으로 효과를 볼 수도 있지만 인위적으로 만든 감정이라 오래 가지 않습니다. 계속 더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하게 되고요. 결국은 내성이 생겨 웬만한 자극에는 행복을 못 느끼게 되죠. 게다가 기술을 쓸 때마다 상당한 에너지를 쓰게 돼 뇌가 더 지쳐 버리기도 합니다.

 오늘 사연 주신 분처럼 평소 활발한 사람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허무와 우울은, 뇌가 지쳤다는 신호입니다. 열심히 살아서 방전된 것이지 인생이 망가진 건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땐 빠르게 쾌감을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느린 놀이가 좋습니다. 큰 모임보다는 마음 편하게 터 놓을 수 있는 친한 친구와의 속삭임, 고전 소설 느리게 읽기 같은 게 느린 놀이입니다.

02 가면을 잠시 내려놓으세요

Q 생각해 보니 항상 강박 속에 산 것 같습니다. 일할 때뿐 아니라 심지어 놀 때도 말이죠.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줘야 하고, 무슨 일이든 맡으면 철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요. 그러다 보니 주변에 사람은 많습니다. 주말에 고민 상담하겠다며 만나 달라는 골드 미스 후배도 한둘이 아닙니다. 집에서 쉬고 싶지만 ‘노’를 못해 결국 나갑니다. 또 모임에서도 선배들이 ‘일 똑부러지게 처리한다’며 중요한 일을 늘 맡깁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인정받는 게 좋았지만 이젠 솔직히 너무 지칩니다. 제일 속상한 건 막상 내가 이렇게 힘들 때 편하게 연락해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A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생각나네요.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느낀다는 심리용어인데요. 다른 사람한테 멋지게 보이기 위해 지나치게 노력하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비춰지는 나와 실제의 내가 너무 멀리 떨어져 버린 거죠.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고 만든 모습은 실제 나와는 다른 사람이니, 계속 노력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뇌는 지쳐만 갑니다.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사람이 어느 순간 조용한 곳에 숨어 버리고 싶다면 그건 원래 내 모습을 찾고 싶은 욕구 때문입니다. 가공하지 않은 나를 받아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인 거죠.

 페르소나는 고대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용어로, 세상에 대처하기 위해 개인이 쓰는 사회적 가면을 말합니다. 이 단어에서 사람이란 뜻의 person, 그리고 인간관계에서의 심리적 특징(성격)을 말하는 personality가 파생됐죠. 성격이란 단어의 시작이 가면이라는 것은 내가 진실하다고 여기는 내 얼굴 표정도 실은 사회와 소통하기 위한 하나의 이미지일 수 있다는 걸 말해줍니다.

 그 가면을 잠시 내려 놓고 실제 내 모습을 드러내는 용기가 필요할 것 같네요.

03 뒷담화 대처법

Q 지쳐서 그런 것인지 전과 다르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도 점점 커집니다. 회장을 맡고 있는 와인 모임 회원 한 사람 때문에 머리가 너무 아픕니다. 다들 싫어해서 탈퇴시키라고들 했지만 저만은 그동안 잘 대해줬거든요. 저한테 잘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알고보니 제 뒷담화를 엄청 했더군요. 심지어 회비 관리에 비리가 있다는 식의 있지도 않은 심각한 흉까지 보고는 정작 제 앞에서는 아양을 떱니다. 다음 주가 와인 모임 송년회인데 이 사람 때문에 나가기가 싫습니다. 그런데 안 나갈 수는 없고요.

 A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어하죠. 하지만 사연 속 모임 회원은 그 욕구를 채우는 방식이 비틀어져 있네요. 다소 병적으로요. 그런데 사실 두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남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공통점 말입니다. 물론 사연 주신 분은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상대를 지나치게 많이 배려하다보니 지친 것이다면, 모임 회원은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능력이 부족한 경우입니다. 히스테리형 성격으로 보이네요.

 히스테리형 성격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픈 욕구가 강합니다. 상대에게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게 어필하지만 막상 상대가 자신을 좋아해 가까이 다가오면 그걸 견디지 못합니다. 본인의 정체성이 약하다보니 타인을 통해 존재감을 유지하는데 막상 남이 내 영역 안으로 침범해 들어오면 오히려 내가 없어지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상대에게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하는 건 이런 이유입니다. 칭찬으로 상대를 끌어당기지만 막상 상대가 가까이 다가오면 그게 싫어 비난을 하는 거죠.

 은근히 주변에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상식적인 대화로 이해시켜 쉽게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냉정한 이야기지만 이런 사람과는 처음부터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일단 가까워져 그 사람 인생 안에 들어가면 쉽게 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미 관계를 맺었다면 적정거리(optimal distance) 유지 전략을 권합니다. 당긴다고 너무 들어가지도, 비난한다고 너무 멀리 가버리지도 않는 선상에서 거리를 유지하는 거죠. 적정 거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 히스테리형 성격도 안정을 찾기도 합니다. 실제 히스테리형 성격 치료에 쓰는 기법인데, 에너지가 상당히 들고 인내도 필요하기에 쉽지는 않습니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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