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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집착하다 파멸될지 모를 '디지털 신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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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이현우
북 칼럼니스트

해가 바뀌면 디지털 시대의 구루인 니컬러스 네그로폰테가 『디지털이다』(1995)에서 디지털 시대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내놓은 지 20년이 된다. 그는 과거의 아날로그 세계가 원자로 구성되는 데 반해 디지털 세계는 ‘비트’로 구성된다고 멋지게 선언했고, 디지털 혁명으로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를 구분했다. 중립적인 구획은 아니다. ‘아날로그’라는 말은 낡은 구세대를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디지털이 대세였다. 그의 책 제목을 ‘이제 디지털이다!’는 구호로도 읽을 수 있는 이유다.

 그 후 10년 뒤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은 『바보상자의 역습』(2005)을 내놓았다. ‘바보상자’는 물론 텔레비전을 가리키는데, 저자는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에 대한 부당한 편견과 비난에 맞서고자 했다. 텔레비전과 비디오게임에 열중하는 세대를 옹호하면서 그는 새로운 미디어가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걸맞은 ‘지적 훈련’을 제공해준다고 했다. 심지어 게임은 “책이나 영화·음악보다 훨씬 많은 결정을 내리게 만든다”. 가령 책은 독자가 주인공의 운명을 결정짓도록 하지 않지만 게임에서는 사용자가 마치 운전대를 쥔 운전사처럼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한다. 그것이 우리를 훨씬 더 주체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고 하면 얼핏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디지털 혁명과 함께 ‘디지털 원주민’이 등장한 지 한 세대가 지났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는 일상을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것이 변했다. 더 나은 세상으로 변화해 간다면 전적으로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은 듯싶다. 미국의 영문학자 마크 바우어라인의 『가장 멍청한 세대』(2008)는 그러한 근심의 근거를 매우 상세하게 제시한다. 가령 하루 세 시간 이상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청소년은 심각한 주의집중 장애가 나타날 위험이 아주 크며 중·고교 이상의 학업을 계속할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아진다. 텔레비전이 아이들을 똑똑하게 만들어줄 거라는 낙관적 기대도 없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지능은 TV시청 시간보다는 독서시간에 좌우된다.

 디지털 전도사들은 게임에 숙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리는 법을 배운다고 주장하지만 그 결정은 표면적인 줄거리에나 적용될 뿐이다. 복잡한 상황에 대한 이해는 물론 도덕적·심리적·철학적 깊이도 포함하지 못한다. 멀티태스킹과 상호작용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는 뛰어난 스크린 이해능력을 보여주지만(그들의 탁월한 게임 지능!) 대신에 독서력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낮아졌다. “그들은 업로드하고, 다운로드하고, 서핑하고, 채팅하고, 포스팅한다.” 그러나 그들은 복잡한 글을 분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정확한 철자법도 모른다. ‘가장 멍청한 세대’라는 비하는 그래서 억지가 아니다. 시각적 자극이 없으면 상상력조차 발휘하기 어려운 세대가 진득하게 『리어왕』이나 『소리와 분노』 같은 작품을 읽어내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대세의 방향을 과연 돌릴 수 있을까. 인쇄문화에 충분히 적응하기도 전에 너무 일찍 도래한 디지털 문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근심하던 차에 사회비평가 닐 포스트먼의 『죽도록 즐기기』(1985)에서 예리한 통찰을 발견했다. 조지 오웰이 경고한 ‘1984년’이 바로 지나자마자 발표한 이 책에서 그는 오웰이 『1984년』에서 그려놓은 디스토피아보다 더 끔찍한 미래상을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본다. 『1984년』에서는 사람들을 고통으로 통제하지만 『멋진 신세계』에서는 사람들에게 즐길 것을 쏟아부어 통제한다.

오웰식 세계에 대해서는 알아차리기 쉽고 이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대중이 끊임없는 오락활동을 문화적 삶으로 착각하는 헉슬리식 세계에서는 그것을 문제적인 상황으로 지각하는 것조차 어렵다. 고통의 파도라면 모를까 즐거움의 파도에 대해 어떤 저항이 가능하겠는가. 포스트먼에 따르면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 봐 두려워한 반면에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서 집착한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 봐 두려워했다. 요컨대 너무 즐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죽어나가는 게 ‘멋진 디지털 신세계’다. 이젠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이현우 북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