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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614>|제79화육사졸업생들|군과 결찰의 충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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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익열중령과 김달삼의 담판이 있었던 그날 (48년 4월28일) 로 일부 지역에서 전투가 종식됐고 3일 뒤에는 제주도에서 대체적으로 총성이 멎었다.
그러나 반도의 귀순과 무장해제는 지지부진이었다. 첫날엔 연소자와 부녀자 몇명이 사용불능의 낡은 총 몇자루를 가지고 새로 마련된 귀순자수용소에 찾아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군이 이들을 손님모시듯 잘보살피고 귀가 희망자는 보내주었더니 귀순자들이 점차 늘어 하산자가급증했다. 연대 병사들도 신이 나서 천막치는 작업을 즐거이 해냈다.
한데, 그 무렵부터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벌기 위한 반도의 술책에 연대장이 기만당했다, 연대장이 쪽도 두목과 내통했다는 것이었고, 이것이 경찰정보로 중앙에 보고됐다.
한편 반도들 사이에서는 연대장이 기만전술로 귀순반도들을 모아 한꺼번에 몰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런데, 4일째 되는 5월1일. 소위메이 데이 (노동절) 날 상오11시 귀순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제주읍외곽 오나리 마을에서 날벼락이 났다. 정체불명의 청년일단이 부락을 기습, 방화한 것이다. 다수의 사망자도 났다.
경찰은 하산·귀순한 자를 배신자라고 간주하는 폭도들의 보북행위라했고, 반도들은 경찰이 서책을 시켜서 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더 큰 사건이 5월3일에 발생했다. 하오3시쯤 반도 2백여명이 하산하여 제주비행장에 설치한 수용소에 귀순해 오겠다하여 9연대병사 7명과 미군사병 2명이 미고문관 「드루스」중위 인솔아래 호송해 오는데 무장대가 카빈과 중기관총을 난사한 것이다.
귀순자 일부가 죽고 생존자는 다시 산으로 도망쳤다. 미군들이 반격해 무장대 5명을 사살했다. 무장된 무장대를 「드루스」 중위가 데려다 치료해주고 알아보았더니 그들은 제주경찰서 (서장 문용채·군영) 소속이라는 것이었다.
제주도 군정당국이 경찰에 진상을 물었더니 경찰과 미군·경비대를 이간시키기위해 폭도들이 경찰로 가장하여 저지른 소행이라는 설명이었다.
그후에도 부락에 대한 방화·습격사건이 빈발하여 많은 민가가 불타고 귀순자와 양민들까지 살해됐다. 입산자가 다시 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4·28협상」은 완전히 파기되어 폭도들의 지서습격이 재개됐다. 반도들은 김익렬중령을 약속을 위반한 배신자라 규탄하면서 결사보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5월6일 정오 제주 군정청이 들어있던 제주중학교에서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군정장관 「딘」장군 (당시 준장)과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사령관 송호성,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군정장관「맨스필드」대령, 제주도지사 유모씨, 9연대장 김익열,제주도경국장 최천등 쟁쟁한 인물과 책임자들이었다.
「딘」장군 주재로 진행된 이 회의에서 그동안 쌓였던 군·경간의 감정과 오해가 폭발하고 말았다.
최천도경국장이 등단하여 『이번 제주도 폭동은 국제공산주의에 의해 사전에조직·훈련·개획된 것이며 군·경의 대병력을 투입하여 합동작전을 펴서 철저히 토벌할수 밖에 없다』 고 말했다.
다음에는 군대측을 대표하여 김익열중령이 상황설명을 하게 됐다. 그는 제주도 폭동은 육지인에 대한 제주도민의 배타성, 경찰의 밀수단속으로 인한 주민의 난동에 공산분자·불평분자가 편승한 것이라고 말하고 경찰의 기강이 문란하여 진압작전에 방해가 많으니 제주도경의 지휘권을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조병옥경무부장이 등단하여 연대장의 말은 경찰을 중상모략하기위한 허위조작이라고 말하고 김중령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사람 앉아 있소!』라고 크게 소리질렀다.
27세의 김중령이 흥분하여 뛰어 올라가『내가 왜 공산주의자냐』면서 당시 54세인 조병옥선생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이를 보고 최천도경국장이 올라가 뜯어 말렸다. 고함과 욕설과 난타전이 시작됐다. 회의장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됐다.
송호성준장이 이를 보고 『이놈, 연대장! 이놈이 누구에게 폭행이냐. 네놈죽을 줄 모르느냐』고 소리질렀다. 안재홍씨도 『외국인들 앞에서 이게 무엇들이오!』했다.
드디어 「딘」장군이 미군헌병을 투입하는 바람에 난장판은 끝났다.「딘」장군은 퉁명스런 어조로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해산이오』하고는 나가버렸다. 안재홍씨는『민족의 비극이오』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김익열중령은 5월6일자로 연대장에서 해임되어 상경해 있다가 다음달 18일 여수의 제14연대장으로 갔다.
경비대 사령부는 반도와의 접촉경위를 조사했으나 김중령의 접촉동기가 불순하지 않았고 적졀한 절차를 거친 것임이 밝혀져 불문에 붙이기로 했으나 공작을 맡았던 연대정보장교 이윤낙중위만은 그책임을 물어 파면시켰다.
3기생인 이중위는 이후낙씨의 사촌동생으로 그후 사업에 착수하여 성공, 지금 부산에 착실한 기반을 닦았다는 말을 듣고 있다.
한편 경비사는 제2·제3·제4연대에서 기간요원을 차출하여 수원에서 제11연대를 창설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5월16일 제주도로 이동시켜 1개대대 규모의 9연대와 부산의 5연대에서 배속된 오일균대대를 흡수하여 완전한 연대규모를 갖추게 한다음 본격적인 폭동진압에 나섰다.
이무렵 전남·경남지역의 남노당소속 공산분자들이 제주도폭동에 가세하기 위해 제주도로 몰려들었다. 군과경찰이 해안을 봉쇄하여 그중 다수를 검거했으나 폭동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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