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⑧기술진보] 77. TV 대변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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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1995년 종합유선방송이 시작되기 전 매일 자정~오전 1시 사이 어김없이 TV에서 울리던 애국가다. TV방송이 끝났다는 신호였던 것이다. KBSㆍMBC 등 통틀어야 네댓 개밖에 되지 않았던 TV 채널에 식상한 시청자들은 ‘혹시나’ 하면서 주한 미군 방송인 AFKN을 틀기도 했던 때다. 95년 종합유선방송 개국은 국내 TV채널의 다양화에 물꼬를 튼 큰 사건이었다. 영화ㆍ스포츠ㆍ다큐멘터리ㆍ뉴스 등 12개 장르에 20개 채널이 일시에 늘어났다.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은 종일 영화만 볼 수 있었으며,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은 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낮 시간이나 밤에는 방송을 하지 않던 기존 지상파 방송과는 달리 종일 방송이 주류를 이뤘다. TV채널이 마치 홍수를 이룬듯한 느낌이었다는 게 당시 시청자들의 반응이었다. 일부 가정에서는 자녀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종합유선방송 가입을 하지 않았다. 개국 당시 23만 명에 불과하던 가입자는 지금 1200만명으로 늘었다.

종합유선방송 개국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비디오와 오디오 채널 등 163개 채널을 운용하고 있는 디지털위성방송, 유료 모바일 방송인 ‘네이트 에어’, 38개 채널의 디지털 멀티미디어방송(DMB) 등 270여 개 채널이 시청자들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다채널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디지털 기술이다. 기존 아날로그 기술을 사용했을 경우 한 채널밖에 수용할 수 없었을 전파를 서너 개 이상으로 쪼개 채널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콘텐트를 시청자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 처음부터 틀어줄 수 있는 주문형비디오 시대가 열린 것이다. 즉,‘아일랜드’라는 영화를 오후 10시에 3번 채널에서 틀어주기 시작했는데,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오후 10시10분에 보기를 원하면 그 시간에 다시 처음부터 다른 채널로 틀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 최초의 TV 방송이 시작된 것은 1936년 독일에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56년 한국 최초의 TV 방송사인 대한방송(HLKZ)이 첫 전파를 발사했다. 화신백화점 진열대에 배치된 TV 수상기를 보고 행인들은 탄성을 질렀다. 비록 소규모 실험적 수준의 방송이었지만 한국 TV사에서 개척자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방송사는 불의의 화재로 문을 닫게 된다.

본격적인 한국 TV 역사는 60년대 경제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시작된다. 61년 12월 31일 KBS가 프로그램을 전송하기 시작했다. 이어 64년에는 동양방송(TBC)이, 69년에는 문화방송(MBC)이 첫 전파를 쐈다. 외형적으로 볼 때 국ㆍ민영 방송 체제로 운영된 것이다. KBSㆍTBCㆍMBC 세 방송사는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여로(KBS)’, ‘수사반장(MBC)’, ‘아씨(TBC)’ 등 아직도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는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TBC의 봉두환 앵커 등 본격적인 방송 뉴스 시대를 열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한국 TV는 양적으로 급성장한다. KBS와 MBC는 전국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TV 수상기 보급률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TV는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80년 한국 TV는 경제 발전과 더불어 흑백은 컬러로 전환된다. 이어 90년대 들어 한국 방송제도는 대대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91년 민영 방송인 SBS(서울방송)가 개국했고, 95년엔 부산방송, 대구방송 등 지역 민영방송들이 속속 출범했다.

가장 먼저 디지털화를 선언한 것은 위성방송이다. 2002년 3월 대주주인 KTㆍKBSㆍMBC가 ‘스카이라이프’ 위성 방송사를 설립해 본격적인 위성 방송이 시작됐다.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고화질ㆍ고음질ㆍ다채널이 특징이며, 동시에 전국에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전국 방송으로 출발했다. 본 방송 당시 스카이 라이프는 74개의 비디오 채널, 60개의 오디오 채널, 10개의 PPV(유료 지불 채널) 등 총 144개 채널과 전자프로그램 채널 가이드까지 서비스했다. 2005년 2월 현재 103개 비디오 채널, 60개 오디오 채널, 16개 NVOD(주문형 비디오) 등 총 163개의 채널로 확대됐다.

2004년은 방송과 통신의 융합이 본격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통신회사인 SK텔레콤은 모바일 방송 유료 서비스인 ‘네이트 에어’를 선보였다. 또 이동 중에도 모바일을 통해 TV방송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는 DMB서비스가 지난 5월 SK텔레콤 자회사인 TU미디어㈜에 의해 세계 최초로 실현됐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그야말로 ‘미디어 빅뱅’ 시대를 맞고 있다.방송과 통신의 융합은 물론 신문ㆍ인터넷의 융합 등 미디어 융합이 이뤄지고 있다. 영국과 미국 등 선진 외국에서 이미 서비스되고 있는 인터넷과 방송의 결합인 IP-TV 서비스의 시작은 다시 한번 한국의 방송 구도를 변화시킬 것이다.

김택환 미디어전문기자

HD 디지털 화질 아날로그의 5배 기미·주근깨·땀구멍까지 생생

▶ 삼성SDI가 2004년 개발한 세계에서 가장 큰 102인치PDP TV. 초대형 TV는 한국이 가장 앞섰다.

지난 3월부터 HD(고화질) 송출을 시작한 KBS ‘뉴스 9’의 두 앵커는 분장 시간이 예전의 두 배나 길어졌다. 과거 아날로그 방송 때는 보이지 않던 수염 깎은 자국은 물론 눈 밑 잡티까지 화면에 잡히는 바람에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HD 디지털 방송의 화질 수준은 아날로그 방송보다 5배 정도 선명하다는 것이 통설이다. 아날로그 TV가 가로 640개, 세로 480개의 픽셀(화소)을 가지고 있는 반면 HD TV는 가로 1366∼1920개, 세로 720∼1080개의 픽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화소 수가 많고, 신호도 안정돼 있어 훨씬 선명한 화면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눈에 띄지 않던 잡티ㆍ기미ㆍ주근깨는 물론 코털이나 화장 자국마저 생생하게 보일 수 있다. 이 때문에 방송 분장사와 코디네이터들은 입자가 고운 고급 파운데이션을 사용하는 등 대비책 마련에 애쓰고 있다. 원단 소재까지 살아날 정도로 채도(선명도)도 강해져 의상도 고급스러운 것을 선택해야 한다. 자연스러움을 살리기 위해 분장 화장품의 양도 아날로그 TV 시대의 절반쯤으로 줄여야 하는 고충이 있다. 과거 흑백 TV 시절처럼 꾀죄죄한 세트나 소품으로 대충 때우던 방송은 이제 꿈도 꾸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디지털 방송은 과거 흑백 TV가 컬러 TV로 전환됐을 때 나타났던 사회ㆍ문화적 충격 이상의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하지만 HD영상 문화는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TV 크기가 점점 커지고, 제품의 화질이 개선되면서 화면은 더욱 선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대부분의 HD TV는 사실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HD 신호 원본(1920×1080)을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크기가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50인치 이상의 대형 LCD 및 PDP TV가 속속 나오면서 원본 신호를 손실 없이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풀(Full) HD’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시청자들은 즐겁지만, 방송 출연자 및 기술자들의 고심은 더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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