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자유당과 내각(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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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자유당 정권의 2인자였던 이기붕-그 일가의 죽음은 자유당정부의 비극적 종말을 상징하고 있다. 그들의 죽음은 자살로 처리되었다. 죽음에 이른 마지막 사흘은 자살이라는 한마디로 묻힌 채 있다.
그들은 서울을 피해 6군단으로 갔었다.

<이기붕자살에 의문>
세칭 서대문경무대로 밀려드는 데모군중을 피해서였다. 그의 피난처 6군단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그는 곧장 갔던 길을 되돌아 왔다. 올 때는 경찰의 호위도 받는 여유있는 걸음이었다. 그런데도 하필이면 그가 택한 곳은 그가 피해가야 했던 데모군중의 한복판 경무대였다. 그곳은 머무를 곳이 못되었다. 더 먼곳으로 가야했고 갈수도 있었다. 망명의 길이다.
운명의 60년4윌28일-그들 일가 네사람의 죽음을 알린 것은 다섯발의 총소리다. 그러나 죽음을 부른 것은 다섯발의 총성이 아닐지 모론다는 흔적이 있었다. 네사람 중의 세사람은 총소리 이전에 숨졌거나 최소한 그를 합한 총구를 의식할수 없었던 흔적이 있었다.
총을 쏜 것은 넷중의 한사람 이강석이라고 했다.
서울시장·국방장관의 아들로 소년시절을 보내고 국회의장의 친아들이자 대통령의 양자-. 그래서 세상의 어두운 면을 모른채 귀공자로만 자란 그에겐 살인무기로서의 권총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그는 전투부대가 아닌 육군본부 의장대 소속이었다. 그런 그가 어버이와 단 하나뿐인 동생을 죽음으로 안내했다고 했다. 스스로의 죽옴도 그가 결행했다고 했다. 몸통을 겨냥한 최초의 일발은 치명상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결코 힘이 남아있지 못했을 법한 손으로 권총을 그의 관자놀이를 겨냥해 쏘았다고 했다. 무언가 뒤죽박죽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일가는 그렇게 삶을 끝냈다고 했다.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일가의 슬픈 죽음은 한순간의 파문으로 지워졌다. 그들 일가의 죽음은 민권의 승리라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앞에선 물거품일 뿐이었다.
그들 일가의 죽음의 사연들이 묻혀 버린 것처럼 자유담의 종말에도 많은 것들이 그대로 묻혀있다. 자유당의 최후만으로 자유당의 모든것을 단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결과는 중요하다. 그러나 과정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자유당에 있어선 결과만으로 과정까지를 단정해버린 것들이 너무 많다. 자유당 정부를 세우고 이끌었던 이승만대통령은 해방정국의 으뜸의 지도자였다.

<현실감각 뛰어나>
8·15이후 그는 전후의 국내의 정세와 한국의 장래를 가장 정확히 내다본 정치인이다. 그는 현실적인 감각과 뛰어난 지도력으로 난마와 같이 얽혀있던 혼돈의 해방정국을 정리해 냈다. 그가 아니었다면 더 오랜 혼란이 계속되었으리라는데 이논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정부는 신생국의 질서를 만들어 나가야 했다. 그것은 가장 곤란한 도전이었다. 훈련된 아무것도 없었다.
국민도, 관리도, 정치단체도 또 정객들도 신생국의 숙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확신만으로 나라를 이끌어갔다. 흔히 사람들은 독단과 독선으로 그를 특징지운다. 그런 면모가 두드러졌다는데 이논을 제기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그가 민주주의자였고 신생국 민중의 민주의식을 개발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도외시하는 것은 옳지않다. 예를 들어 이박사의 독재주의 경향은 부산정치파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부산정치파동은 대통령직선제와 내각 책임제가 충돌한 정치폭풍이다. 대통령은 직선제를 밀어붙였다.
그에 도달하는 과정엔 무리가 있었다. 그랬지만 파당놀음에 영일이 없는 정치인들로부터 정치를 민중의 것으로 확산했다는 데서 파동의 결과는 이박사와 이나라 민중이 얻어낸 정치적 승리였다는 측면도 함께 저울대위에 올려져야 한다. 적어도 대통령직선제가 「나랏님 의식」에 젖어있던 50년대 이땅의 민중에게 백성은 정치를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해야 한다는 민주의식·시민의식을 일깨우는데 있어 기여한 것이 얼마나 컸다는 것을 그 이후의 정치가 말해주고 있다.
이대통령은 자신의 능력만을 믿었다. 그는 자기가 없으면 이나라를 돌볼 사람이 없다고 확신했고 그것이 그의 통치를 실패로 결말냈다고 했다. 그랬지만 대통령의 통치방식에 대한 확신속에 민중에 대한 신뢰가 바탕해 있었음을 간과한다.
그는 민중을 사랑했고 민중의 애국심을 신뢰했다. 그는 정치인도, 관료도 믿지 않았지만 민중만은 신뢰했다.
민국수립 30여년사이 부침한 많은 정치인들중 민중을 신뢰하고 민중을 두려워한 점에선 이대통령만한 정치인을 찾기는 어렵다. 그만큼 그의 통치의 바닥들엔 그런 숨결을 찾을수 있다.
그의 마지막 결단은 그런 그의 면모를 극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는 4·19때 선거부정의 얘기를 듣고 「그게 무슨 소리야, 선거부정이 있으면 나라를 망친다」고 했다. 4월26일 많은 학생들이 희생됐다는 말을 듣고 대통령은 「어떻게 국민을 죽일수가 있어, 내가 물러나야지」라며 하야성명을 받아쓰게 했다.

<한때 정당을 부인>
그는 그리도 다급하게 물러나지 않을수도 있었다. 초대총리였던 이범석같은 이도 성급한 하야를 만류했다. 그랬지만 더이상 자기를 원치 않는다는 민중의 뜻을 알았을 때 주저함이 없이 물러났다.
흔히 이대통령을 가리켜 외교에는 탁월했지만 내정엔 어두웠고 어리석었다고 평한다.
특히 인사가 무원칙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확실히 그의 내각은 너무 빈번히 교체되었다.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불신도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는 정당이나 정치를 너무 낮게 평가했다. 그는 환국이래 줄곧 정당을 부인했다. 그렇던 대통령이 51년 정당의 창당을 역설함으로써 그의 생각을 바꾸었다.
이것은 민주화로 가는 이정표에서 하나의 진전이었다. 더우기 그가 자유당의 지표로 제시한 것은 민중의 정당이었다.
『이승만은 민국당과 대항할 노동자와 농민의 신당 건설을 지지한다. 민국당은 지주와 기업인의 단체며, 현재 활동범위를 국회밖에까지 갖고있는 오직 하나의 정당이다.
신당은 부분적일지라도 노동자·농민의 지지를 획득할 것이며 한국은 양당제국가로 발돋움하려 하고 있다』
당시의 UP통신 보도다.
그시기 대통령이 신당에 거는 기대는 컸다. 많은 사람들도 정당정치가 터전을 잡아 나가리라는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다. 자유당은 그런 사명과 기대라는 책무를 걸머지고 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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