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만화가 윤태호의 未生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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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만화가 윤태호를 만나기 전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샐러리맨들에게 웹툰 '미생' 열풍이 일고 있고, 그 웹툰이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유로 진행된 인터뷰.

만화 '이끼'로 2007년 각종 만화 상을 휩쓸기도 했던 유명 만화가를 알아보지도 못한 무지한 사진기자이니 인터뷰라도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야 했다.

다행히 바둑은 조금 아는 탓에 ‘미생마(未生馬)’란 뜻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죽음과 삶이 결정되지 않은 돌, 바로 미생마이다. 바둑판에 미생마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 바둑이 끝날 때까지 고달프게 된다. 살 확률보다 죽을 확률이 높다. 미생마를 살리기 위해서는 처절한 몸부림을 해야 한다. 때론 수족을 잘라내는 희생을 감내해야한다.

더구나 완생(完生)을 했다고 해서 그 바둑을 이기는 것도 아니다. 완생을 위해 치른 희생의 대가로 그 바둑을 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한 처지가 되기 십상이다. 그래도 그냥 죽일 수는 없다. 어떻게든 버텨 살려야한다. 그 미생이 바둑판이 아니고 우리 삶에서 미생이라면 끔찍한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취재기자가 물었다. 만화가로서 당신의 미생 시절은 어떠했습니까?

본능적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다행히(?) 떨어졌습니다. 육성회비를 제때 못 낼 정도로 가난했기에 미술을 제대로 공부할 형편이 못되었죠.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신문에 만화를 연재할 만큼 만화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허영만 선생의 문하생이 되고 싶었습니다.”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작업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소와 연락처도 모른 채 무작정 그곳으로 찾아갔습니다. 몸 뉘일 곳 하나 없는 처지이니 노숙을 했습니다. 온몸을 펴고 자도 아침이면 무릎이 자동으로 오그라들기 마련인 게 쪽잠이더군요. 그런데 쪽잠보다 서글픈 건 창피함이었습니다. 스무 살 다 큰 청년이 오가는 여고생들의 눈빛을 감당하기엔 너무 창피했습니다. 하루 이틀 그렇게 버틴 게 석 달입니다. 우연히 허영만 선생의 문하생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내 그림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버텼습니다. 그것마저 없다면 무너져 버렸을 겁니다.”

바둑을 복기하듯 미생시절을 되짚는 윤태호 작가, 끔찍하게 아팠을 이야기를 참 담담하게 풀어 놓는다.

때론 웃음까지 보여준다.

인터뷰 후의 사진 촬영, 윤 작가가 물었다.

“모자를 벗지 않고 촬영해도 될까요?”

“당연히 됩니다. 덥수룩한 수염에 너덜너덜한 모자, 노숙자 모습 표현하기에 딱 좋겠네요. 이참에 아예 누워서 사진 찍으시죠. 쪽잠 포즈로…”

흔쾌히 응한 쪽잠 포즈, ‘버텨 낸 이’의 당당함이 없다면 흔쾌히 응할 수 없는 포즈다.

하나 더 고백하건대, 그날의 단행본 '미생'이 지금의 ‘미생 신드롬’을 불러일으킬 줄 상상도 못했다.

나는 여태 ‘미생 사진기자’인 게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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