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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자리 사라지는 저축은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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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3년 전 저축은행에서 연 7.5% 금리로 3000만원의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이모(35)씨는 두 달 전 시중은행으로 대출을 갈아탔다. 은행의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이 70%로 완화돼 기존 대출에 추가해 3500만원을 더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리도 고정금리로 연 3.6%여서 저축은행보다 훨씬 낮았다. 이 씨는 “저축은행 빚을 갚느라 매달 생활비가 빠듯했는데 은행으로 갈아타면서 부담이 좀 줄었다”고 말했다.

 저축은행이 설 자리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돈을 굴릴 데가 없어 고금리 예금을 내놓지 못하고, 은행 대출규제 완화와 금리 하락으로 대출은행에서 돈을 빌리려는 고객들이 갈 수록 줄고 있다. 21일 저축은행 업계에 따르면 올 10월 저축은행 여·수신 규모는 각각 31조2280억원과 29조3864억원을 기록했다. 석달 전보다 조금 늘었지만 일년 전과 비교하면 비슷하거나 오히려 줄었다. 올 하반기 은행을 비롯한 전체 금융권의 가계대출이 크게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저축은행만 뒷걸음질을 친 셈이다.

 저축은행에게 타격을 준 가장 큰 원인은 총부채상환비율(DTI)과 주택담보대출비율(LTV) 같은 대출규제 완화다. 담보가 있는 우량고객이 더 싼 금리를 찾아 은행으로 빠져나갔다. 이전에는 비은행권(60~85%)이 은행(50~70%)에 비해 LTV가 높았지만 지금은 전 금융권이 똑같이 70%를 적용받는다. 게다가 기준금리가 하반기에 두 차례 인하되면서 빚을 잘 갚는 고객들이 속속 ‘은행 갈아타기’를 택했다. 금융연구원 조사 결과 지난달 제2금융권에서 은행으로 유입된 주택담보대출 고객의 70%가량이 신용등급 1~4등급인 것으로 나타났다.

 빈자리를 메꾸기도 쉽지 않다. 금리가 낮은 정부의 서민금융 상품들이 시장을 크게 좁혀놓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2008년 이후 햇살론과 새희망홀씨, 바꿔드림론 같은 정책금융 상품을 쏟아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시작된 국민행복기금은 지난 8월까지 지난 8월까지 총 29만6000명에게 채무원금 1조1000억원,연체이자 2조1000억원을 탕감해줬다. 남은 금액도 저금리로 대환대출을 받게 했다. 저축은행에 손을 빌릴 서민들이 크게 줄어든 셈이다.

 중소기업 대출 시장도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정부가 기술금융을 독려하면서 은행권이 중소기업 대출을 크게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권의 한 대형 저축은행 대표는 “은행들이 예전보다 낮은 금리와 조건으로 대출을 해주고 있어 저축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으려 하는 중소기업이 크게 줄었다”고 전했다.

 돈 빌려줄 곳을 찾기 어려우니 고금리 예금을 유치하기도 힘들어졌다. 최근 시중 금리보다 1%넘게 준 특판상품을 판매한 저축은행 관계자는 “고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특판을 했지만 대출할 곳이 없어 돈을 쌓아만 둘까봐 짧은 기간에 끝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저축은행이 예전같은 인기를 되찾기는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 고금리 예금을 끌어모아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같은 고위험 대출을 하다 ‘저축은행 사태’라는 사달이 났기 때문이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강문성 선임연구위원은 “저축은행 등 서민금융 회사들이 자신의 고객인 저신용 계층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는 등 대출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금융연구원 이재연 연구위원은 “저축은행은 고객의 평판이나 상환 의지까지 고려하는 관계형 금융으로 살 길을 찾아야 한다”며 “정부도 이런 대출에 대한 감독 기준을 완화하는 등 일부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심새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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