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포츠머스 조약의 역사적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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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올해가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지 100주년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배경에 100년 전 바로 오늘 새벽(미국시간으로는 9월 5일 오후) 미국 뉴햄프셔주의 포츠머스에 있는 해군기지에서 러일전쟁을 마무리하는 강화조약 조인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포츠머스 조약은 한 달 가까이 계속될 정도로 난항을 겪었지만 주로 만주와 사할린 및 배상금 문제가 걸림돌이었을 뿐, 한국 문제는 회담 시작 일주일 만에 이미 타결되어 있었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가지고 있는 정치.경제.군사적 우위를 전적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한국 지배를 위한 최후의 장애요인이 제거되었고 '을사보호조약'과 식민지화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미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한다는 것은 일본과 영국, 미국 사이에서 합의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포츠머스 강화회의가 진행되던 1905년 8월에 영일동맹을 비밀리에 개정하여 일본이 조선을 '지도감리 및 보호 조치'를 취하도록 인정하였다. 미국도 그해 7월 27일 태프트 전쟁장관과 일본의 가쓰라 총리가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이익과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이익을 교환한 각서를 비밀리에 작성하였다.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공공연하게 자신이 친일파라고 자처하였으며,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열망하였다. 그는 그것이 동아시아의 정세를 안정시키는 길이며 한국인들을 위해서도 나은 선택이라고 믿었다. 포츠머스 회담에서 그는 일본 대표단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문에 응했으며, 회담이 결렬 위기에 빠졌을 때 중재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약 체결 후 "나는 이전에도 친일파였지만 앞으로 더 확고한 친일파가 될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한국인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조치도 제대로 취할 수 없는' 민족이라고 생각했던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회담 중재로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결국 한국의 희생쯤은 세계 평화를 위해 필요한 조치였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해 11월 17일 '보호조약'이 체결된 바로 다음날 미국 정부는 공사관을 폐쇄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런 열강 간의 동향을 알지 못했던 고종은 여전히 미국이 한.미 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입각하여 일본의 침략을 저지해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1905년 여름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가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동행했던 뉴랜즈 상원의원은 국제변호사를 고용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해 당당하게 항의하라고 충고하였으나 일본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것을 두려워한 고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보호조약' 협상을 위해 서울에 나타났을 때, 고종은 다시 미국 공사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 공사는 묵살하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미국인 외교고문 스티븐스가 친일적이라고 살해하였지만 그가 미국 정부의 방침을 충실하게 수행한 것임을 모르고 있었다.

'을사보호조약'과 식민지화를 일본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국한시키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열강들이 만주에 대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한국을 일본의 손에 넘겨준 것이라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의 우리 현실이 19세기 말의 대한제국과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세는 여전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세계 최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어 전쟁의 위험은 여전하고, 강대국들이 동아시아의 세력균형과 자국의 이해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을 한국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결정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00년 전의 역사는 우리에게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