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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섭의 시대공감] ‘저성장 악순환’ 벗어나는 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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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호 31면

한국 경제의 내년 화두(話頭)는 올해와 마찬가지로 내수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도 최근 ‘내수 견인을 위한 재정 조기집행’을 강조했다. 수출은 지속적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내수 부진으로 저성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당연한 정책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민간이 활력을 잃으면 정부가 마지막 보루다. 미국도 2008~2009년 세계 금융위기를 당한 뒤 정부에서 무제한 돈 풀기라는 극약처방을 써가며 경기를 떠받쳤고 5년가량이 지난 지금에서야 민간경기 회복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도 지금의 저성장 국면이 장기불황으로 악화하지 않도록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명제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별로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정부에서 경기를 받쳐주는 동안 민간 부문의 활력이 과연 회복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해소되지 않는 데 있는 것 같다. 내수부진의 핵심 원인을 살펴보자. 소비는 가계부채 문제와 고령화·저출산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억눌리고 있다. 투자는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투자로 인한 낙수(落水)효과가 크게 약해졌다는 데 심각성이 더 크다. 투자의 고용창출이나 임금상승 효과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수의 두 축인 소비와 투자에 이렇게 풀기 어려운 듯한 문제가 난마(亂麻)처럼 얽혀 있으니까 이것들만 쳐다보면 한국 경제가 ‘저성장의 악순환’에 있는 것 아니냐는 비관론에 쉽게 빠져든다. 정부가 돈을 투입해도 헛돈 쓰는 것처럼 느껴지고 ‘재정 건전성’마저 훼손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나올 수 있다.

이렇게 비관론이 세상을 사로잡고 있을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한국 경제 발전 초기의 상황을 보자. 그때 흔히 듣던 얘기는 ‘빈곤의 악순환’이었다. 지금 나오는 ‘저성장의 악순환’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었다. 한국 경제 내부만 봐서는 발전의 맹아(萌芽)라는 것을 찾기 어렵고 비관론에 빠질 이유만 줄줄이 있었다. ‘내수’는 거의 없다고 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해외를 지향하고 “잘살아 보세”라는 마음으로 민간과 정부가 역량을 합쳐 노력하자 ‘경제 기적’이 일어났다.

지금의 내수부진과 저성장 해결책도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내수만 쳐다봐서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효과 없는 내수 확대책을 자꾸 내놓기보다 해외시장과 해외 역량을 더 폭넓게 활용할 방안을 찾는 데에서 실타래를 풀어야 하지 않을까.

최근 국내 경제정책 논쟁에서 한 가지 염려스러운 점은 수출과 내수를 상충하는 듯이 취급하는 것이다. “정부가 수출기업 위주의 정책을 취하다 보니 내수가 위축됐다”는 등의 진단이 여과 없이 범람한다. 한국은 중규모 국가다. 아무리 선진화되더라도 인구가 훨씬 많은 미국이나 일본 등에 비해 내수의 비중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내수시장은 세계시장에 비해 갈수록 작아진다. 경쟁력에는 ‘규모의 경제’가 중요한데 작은 나라일수록 내수시장으로 경제단위를 맞추기가 어렵다. ‘내수 살리기’가 ‘내수 위주 성장’으로 이뤄질 수 없는 이유다. 오히려 수출을 더 늘리고 내수 비중도 함께 키우는 수출·내수 동반성장책을 찾는 것이 쉬울 수 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고령화·저출산’의 문제도 외국 인력과 외국 기업들을 더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해결하는 것이 현실적일 수 있다. 국내적인 대책이라고 해봤자 출산장려책 정도인데 그로 인해 아이들이 더 많이 태어난다 한들 이들이 성장해 세금을 낼 수 있을 때까지는 한 세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동안은 이들을 키우는 데 돈만 더 들어간다.

한국 경제가 성장했고 생활 인프라 등이 잘 갖춰져 있어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외국인은 전 세계에 널려 있다. 특히 중국, 동남아 국가 등 신흥국에서는 세금을 낼 수 있을 정도의 능력 있는 중급·고급 인력이 한국에서 일할 기회가 되면 올 사람이 많다. 이들을 대거 끌어들여 한국 경제의 저성장 탈출에 기여하게 하고 그 과실을 함께 나누는 방안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은 한국 사회가 저임금 노동자 위주로 외국 인력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외국 인력 유입은 골칫거리라고 생각하는 등식이 국내에 고착됐다. 전향적 자세를 취하고 시스템을 조금 더 잘 만들면 능력 있는 외국인이 많이 들어올 여지가 클 것이다.

한국은 수출 주도라는 해외 지향 성장책으로 경제기적을 일구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저성장의 악순환을 탈피하고 일본식 장기불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내수만 들여다볼 게 아니라 ‘제2의 해외 지향 성장책’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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