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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3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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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수인은 척 보기에도 벌써 옷 주제며 몰골이 꾀죄죄한 손학규와 나를 보더니 마침 그날이 월급날이었다며 근처에 있는 '사철탕'집으로 데려갔다. 그날 우리는 아마 그의 월급의 거의 절반을 '두루치기'와 술값으로 먹어 치웠을 것이다. 박윤배는 그 무렵의 우리의 행적을 간접적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만났을 때에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작가요. 무슨 일을 벌이려고 서두르지 마시오. 기본 바탕이 제대로 된 작가로 성장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 소설가의 작업이 수만 명의 힘과 같으니까.

지금은 이수인이나 박윤배 두 사람 모두 이 세상에 없다. 박윤배가 80년대 말에 작고했을 때에 상가에 갔더니 알만한 사람들이 보였고 이부영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내다운 사람들은 점점 사라져 간다'고 탄식하던 게 생각난다. 이수인도 내가 감옥에서 나올 무렵에 백낙청과 함께 면회를 와서는 나의 방북이며 저간의 행동을 야단치기에 좀 삐쳐서 항의 비슷한 편지를 보냈던 일이 있었다. 그러고는 나와서 한길사에서 단재 신채호의 이름을 빌어 주는 '단재상' 시상식장에서 이영희 교수와 함께 만났는데 어쩐지 눈매에 검은 흔적이 보이고 맥이 없어 보이기에 건강을 염려했더니, '운동을 게을리했더니 몸이 개운치를 않다'고 얼버무렸다. 사진도 같이 찍었는데 일주일 뒤인가 그가 갑자기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피차 늙어 가지만 꼼꼼한 백낙청 곁에 호탕한 경륜의 그가 좀 더 오래 머물러 있었으면 했는데.

어느 날, 야근 들어갔다가 아침에 자취방에 돌아갔더니 학규가 웬일인지 아침 출근도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 긴장된 얼굴이었다.

-형, 내 주위에서 사고가 터진 모양인데 모두 철수하기로 했어요. 혹시 형두 찾을지 모르니까 일단 여기를 정리합시다.

-뭐야, 여기서 누가 일 저질렀대?

-별 건 아니고 책 읽는 모임에서 걸린 모양이오.

그를 먼저 보내놓고 그달치 방세는 이미 나간 거니까 그냥 소리 없이 방을 비우기로 작정했다. 월말에 소식이 없으면 주인이 찾아와서 세입자가 없는 것을 확인하게 될 테니까. 나도 짐을 꾸리고 세간을 정리하니 그동안 야금야금 날라다 놓은 물건이 제법 큰 짐 두 개가 되었다. 여대 앞의 셋방살이하던 집으로 돌아가니 아내는 내가 철수한 것으로 알고 반가워했다. 며칠 뒤에 손학규가 검거되었다고 주위에서 알려왔다. 나는 그와 얘기한 것도 있고 해서 당분간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잠잠해지려면 주위의 말처럼 두어 달은 지나야 할 것 같았다. 아내에게 의논하니 그네는 아무도 모르는 곳보다는 무슨 일이 있으면 곧 연락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데가 좋겠다는 것이었다.

-마산에 제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 동생도 글 쓰고 책 읽기 좋아하는 중학교 국어 선생이니까 낯선 데서 지내기는 외롭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 길로 야간열차를 탔다. 군대 갔을 적에 진해에서 마산까지 두어 번 외출을 나가기도 했고, 김지하가 정보부에 의해 강제로 가포 요양원에 입원 당했을 때에는 오동동의 주점들을 훑으며 며칠을 보내어 전혀 낯선 고장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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