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불' 제때 못켜는 신용평가社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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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회사채나 기업어음(CP) 등 기업이 발행한 채권에 신용등급을 매기는 신용평가회사들이 사전 경고라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11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금융시장 불안 등에 따라 국내 3개 신용평가기관은 올해 1분기(1~3월) 회사채의 신용평가 등급을 전반적으로 하향조정했다.

그러나 채권을 거래하는 증권.투신사 관계자들은 신용평가기관의 이 같은 신용등급 조정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이라고 지적한다. 시장에선 다 알고 있는 문제가 현실로 나타나도 이들은 잠자코 있다가 환부가 곪아터진 뒤에야 칼을 들이대는 식이라는 비판이다.

대한투신운용 권경업 채권운용본부장은 "외환위기 이후 신용평가사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긴 하지만 개별 기업에 대한 사전 경고 기능은 여전히 취약하다"고 평가했다.

◆'신용 잃은' 신용등급 조정=금융감독원에 따르면 1분기 중 한국기업평가.한국신용평가.한국신용정보 등 3개 신용평가기관이 신용등급을 조정한 업체는 45개였다. 이 중 30개 업체의 신용등급이 하락했으며, 15개는 등급이 상향조정됐다.

이에 따라 등급 상향조정 업체수를 하향조정 업체수로 나눈 상향.하향 비율은 2000년 2.14, 2001년 1.81, 지난해 1.35보다 크게 낮아진 0.5에 불과했다.

이처럼 등급 하향조정이 줄을 이었지만 채권유통을 담당하는 이들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동원증권 채권영업부 관계자는 "신용등급이 조정되기 전에 문제가 있는 회사의 채권은 이미 거래가 안 되고 있었기 때문에 등급 하향조정은 마지막 '확인 사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3월 중순 신용카드사들의 유동성 위험이 불거지자 신용평가기관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같은 달 26일 카드채에 대한 신용등급을 한 단계씩 내렸다. 그러나 당시 이미 일부 투기적인 개인투자자 외에는 카드채를 사려는 이들이 없는 상태였다.

삼성증권 채권영업팀 관계자는 "카드채가 불안하다는 것은 지난해 카드 연체율이 급상승하면서 예고됐던 것"이라며 "대우.현대그룹 사태 등에서 이미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젠 신용평가기관들의 '뒷북 등급조정'에 무감각해졌다"고 말했다.

신용평가기관들은 또 검찰이 3월 11일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건을 발표한 이틀 뒤에 이 회사 회사채의 등급을 기존 A에서 CCC로 무려 11단계 낮췄다. 그러나 SK글로벌을 포함한 SK그룹에 폭풍우가 불 것이란 점은 2월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사전 경고 기능 강화해야=역할이 미미했던 신용평가기관들의 기능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게 시장 관계자들의 평가다.

그러나 S&P.무디스 등 세계적인 신용평가기관들이 엄격한 잣대로 등급을 조정하고 사전 경고 또한 활발한 것에 비하면 국내 평가사들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미진하다.

삼성증권 리서치센터 장영규 채권분석팀장은 "평가사들의 수익 중 70% 이상을 차지하는 평가수수료를 기업에서 받기 때문에 평가사들의 운신폭이 넓지 못하다"며 "특히 지난해와 올해처럼 회사채 발행 물량이 많이 줄면 평가사들의 시장 쟁탈전이 더 치열해져 냉정한 평가를 내리기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평가기관의 관계자는 "신용등급은 기업의 미래상황까지 감안한 것으로 현재 상황과 거리가 있다고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만은 없다"며 "특히 사전 경고나 등급 조정이 기업의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등급평정엔 보수적인 시각이 우선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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