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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남자들의 수평적 모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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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김형경
소설가

그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조직 내 어떤 모임에도 가입하지 않고 어느 라인에도 줄 서지 않는 사람이었다. 구성원들의 체형과 성향이 비슷하게 변해가는 조직에서 그는 끝까지 독립군으로 버틸 수 있는지 실험하는 것 같았다. 혹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개인의 실존을 극단까지 밀어붙이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그는 내가 예전에 다녔던 회사 선배다.

 남자들은 셋만 모이면 위원회를 만든다고 한다. 힘의 서열에 침묵의 합의를 한 후 한 사람은 위원장이 되고, 나머지는 총무와 회원이 된다. 그러한 조직과 단체들이 수직 서열에 따라 피라미드처럼 배열되어 있는 형국이 남자가 파악하는 세상이다. 그리하여 남자들은 평생을 두고 갈등한다. 조직에 순응할 것인가 떠날 것인가, 권위에 복종할 것인가 반발할 것인가, 라인에 설 것인가 벗어날 것인가. 그런 선택을 할 때 남자들은 가끔 생존이 걸린 듯한 위기감을 느낀다. 조직의 쓴맛에 대한 선험이 있는 것처럼.

 영국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콧은 ‘중간 공간’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성장을 촉진시켜주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초기에는 가정이 그 역할을 하고, 이후 성장하면서 만나는 모든 조직들이 개인의 성숙을 돕는 중간 공간이 된다. 남자들이 만드는 위원회나 단체들도 실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경험과 지혜를 쌓도록 도와주는 촉진 환경인 셈이다. 조직이 ‘아버지의 이름’에 복종해야 했던 공포를 연상시킬 것인지, 건강한 중간 공간이 되어 줄 것인지는 구성원들이 만들어가기 나름일 것이다.

 미국 남성운동가들은 ‘남자들의 수평적 모임’을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 여자들의 우물가 모임처럼 남자들의 공동체는 일정한 시간·장소를 정해 놓고 만나 자기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남자들이 평소에 들여다보지도 않고 내놓으려고도 하지 않는 속내 이야기와 내밀한 감정을 표현한다. 아버지 역할이나 섹스 이야기, 혹은 직장 내 갈등 같은 것. 물론 한 명의 심리학자가 주도하면서 모임이 건강한 촉진 환경이 되도록 의식적으로 이끌어간다. 미국에는 그런 남성 그룹이 무수히 많다고 한다.

 독립군이었던 예전 선배는 후배들이 내미는 모든 질문에 답을 갖고 있었다. 어떤 후배가 “직장에 남을까요, 내 길을 갈까요?” 조언을 구하면 무조건 네 길을 가라고 권했다. 그런 갈등이 있다는 것은 사용하지 않은 생의 에너지가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생각해보면 그 선배가 있어 그 조직의 촉진적 기능이 더욱 빛났던 듯하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