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진보당 사건 (5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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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진보당 관계자들은 죽산의 목숨을 법에만 매달릴 수 없어 정치에도 손을 내밀었다. 죽산의 외동딸 호정의 탄원서는 그 하나다. 죽산의 구속 이후 호정의 애태우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죽산에게 사형을 확정시킨 김갑수 대법관마저도 『공판 때마다 볼 수 있는 딸 호정의 애절한 모습은 죄를 지은 것은 아버지고 벌을 받는 것은 딸이구나』고 쓸 정도였다.
대통령, 국회의장 등 관계 요로에 보내기 위해 씌어진 탄원서 역시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애절한 탄원서>
『(전략) 저는 아버님의 망명지 상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느 부녀 사이든 모두 정답겠지만 저희 부녀 사이는 더 많은 정과 슬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일본 경찰에 잡히게 되어 병든 어머님과 저는 친척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고향 강화로 왔습니다.
아버님의 구속이란 충격 때문인지 어머님은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저는 여섯 살이었습니다. 글을 몰랐기 때문에 할아버지께서 써주신 글을 제가 그려 아버님께 보내는 편지로 만들어 신의주 형무소로 띄웠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기 일곱 해만에 저희 부녀는 만났습니다. 그후 인천에서 새 어머니를 맞아 살았습니다.
어머님도 항일 운동을 하다가 감옥살이를 했기 때문에 감시는 이중으로 심한 고통스런 날들이었습니다. (중략) 아버님은 박사님의 초대 내각에 농림 장관 일을 보셨습니다. 두차례 국회 부의장으로서 직무에 충실했습니다. 6·25 공산 남침 때만 해도 저의 아버님은 최후까지 국회 중요 서류를 옮기고 뒤처리를 하시느라 저희들 가족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어머님을 죽음의 땅으로 끌려가게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와 저는 아버님을 원망하기까지 했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운명이 어찌도 기구하신지 일제 때는 항일 투사로 구사일생을 하고, 6·25 때는 「반역자 조봉암을 처단하라」는 공산당 벽보가 서울 거리를 휩쓸었고, 오늘은 아버님이 심혈을 기울이신 대한민국의 품안에서 사형수의 신세가 되어 있는 것입니까. 참으로 하느님도 무심하다고 하겠습니다.
박사님 저의 아버님은 결코 정부가 오해하는 것같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꽃과 달을 보시면 시를 읊으시고, 영화를 감상하다가도 가련한 장면이나 처참한 장면을 보면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저는 마음이 아파「아버님 그만 보고 가십시다」고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이런 분이 어떻게 공산당과 내통하겠습니까. 더군다나 반역자로 낙인찍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공산당과 어찌 기맥이 통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님의 사생활과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저로서는 백번 천번 죽어도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입니다. 박사님 저의 이 애끊는 심정을 굽어 살피사 아버님에 대한 사형을 면하게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저의 아버님은 곡 사형을 받아야만 되는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해와 같이 넓으신 마음으로 저의 아버님 목숨을 재발 살려주십시오 (하략).』
그러나 이 탄원서는 이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자유당 간부 등 여러 사람을 통해 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기붕 국회의장에게는 호정이 직접 전하려 했다. 그는 의장 자택을 찾아가 모교인 이화여대 스승이던 박마리아 여사를 만나려 했으나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다음날 이화대학으로 찾아가 가까스로 박 여사를 만났다.

<박 마리아는 외면>

<선생님 저의 아버지는 죄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의장님께 잘 말씀드려서 탄원서를 전달해주시고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박 여사는 호정의 얼굴도 탄원서도 쳐다보지 않았다. <남자들이 하는 일을 내가 뭐라고 한담><선생님 어쨌든 꼭 전해주시고… 저의 평생에 다시없을 소원입니다…><두고 전해는 주지>라는 박 여사의 말을 뒷전으로 하고 교수실을 나서는 그녀는 흐르는 눈물로 앞이 가려 비틀거렸다.
호정의 애절한 발걸음은 전 총리 장택상씨를 구명 운동에 나서게 했다. 장씨는 그때를 회고해 이렇게 썼다.
『죽산은 공산주의 테두리에서 벗어났다고 믿었고 지금도 또 믿고있다. 6·25동란을 당해 국회가 부산으로 옮겨갔을 때 나는 국회의 대표로 정부 사람들과 제5차 유엔 총회에 가게되었다.
그 사명이란 유엔군 증파와 국군의 장비 문제였다. 이때 대한민국 판도는 7개군을 제의하고는 전부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고 부산 함락은 시일 문제였다. 그때 어린 자식들과 늙은 처를 부산에 남겨두고 떠나는 나의 심정은 한심하기만 했다.
당시 국회의장은 해공이었으나, 나는 특히 죽산에게 내 가족을 부탁했다. 나는 내 가족들에게 <내가 미국으로 떠난 뒤에 만일 불행히도 부산에 어떤 사고가 생기면 조 부의장의 지시를 받아 행동하라>고 일렀다.
그러고 나서 죽산에게 <내가 유엔에 간 뒤의 내 가족에 관한 것은 모두 부탁한다>고 유언처럼 담당했다. 죽산은 이 말을 듣고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문득 하는 말이 <부인께 이 말씀을 여쭈웠소>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죽산 눈에는 눈물이 글썽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공산당 잡던 전 수도청장이 공산당원 조봉암에게 가족 부탁을 다 하나>고 하면서 파안대소하는 것이었다. 그는 웃음을 거두더니 내 손을 잡으며 <걱정말게. 내가 보살피지>하고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본국을 떠났으며 미국으로 가는 길에도 나는 가족들의 안위에 대해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듯이 죽산을 믿은 것은 죽산이라는 인물이 일을 당해서는 차근차근하고 조심성이 많기 때문이었다. 죽산은 머리가 예민한 사람이라 그가 정신착란에 걸리지 앉는 이상 김일성의 첩자로부터 돈 몇푼에 말릴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믿고 싶다.

<진상은 하늘만이>
이야말로 그 진상이야 하늘이나 알고 땅이나 알지 인간으로서는 모를 일이지만 나는 부산에서 미국으로 떠날 때 죽산에게 진 부채를 어느 정도나마 보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죽산이 처형당하기 얼마전 하루는 죽산의 영애 호정이가 내 집을 찾아와<일이 닥쳐온다>는 뉴스를 내게 전하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즉시 구명운동에 나섰다.
나는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산 이름으로 내놓을 성명서도 준비했다. 내가 저작한 것을 윤길중군이 받아쓴 것이다. 윤 군은 이 성명서를 가지고 형무소로 가 죽산에게 성명서 내용을 말하려 하자 죽산은 <창낭이 집필했으면 그만이지 내게 설명은 무슨 설명이냐>고 윤군을 나무랐다고 했다. 그만큼 그도 나를 믿어 주었다. 그랬지만 이 모두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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