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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11시간 일하고 받은 월급 92만원…한국에서 나는 노예"

중앙일보

입력

2012년 8월, 스레이 나비(21ㆍ여) 씨는 난생 처음 고국 캄보디아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해외취업 브로커를 통해 알선받은 일자리에 취직하기 위해서였다. 전북 익산의 한 야채 농장에서 근무하는 자리로 근로계약서 상 근무조건은 훌륭했다. 아침 9시에 출근해 저녁 7시에 퇴근하고, 살 집과 음식도 모두 제공해준다는 조건이었다. 나비 씨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외국에서 일한다는 생각에 무섭기도 했지만, 고향에 있는 부모님과 나만 바라보는 형제자매 6명을 위해 해외 취업을 결심했다”고 했다.

하지만 나비 씨가 한국에서 마주한 현실은 근로계약서와는 딴판이었다. 그는 “사장이 마련해준다는 집은 농장 비닐하우스에 있는 컨테이너 가건물이었다”며 “여름엔 땀이 줄줄 흐를정도로 더워서 잠을 못 이루고, 겨울엔 너무 추워 옷을 껴입었는데도 동상 직전까지 갔다”고 말했다. 음식도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 사장은 그녀를 비롯한 이주노동자 5명에게 생쌀만을 줬다. 반찬으로 먹을 야채는 농장에서 몰래 씨를 받아 비닐하우스 옆에서 길렀다. 이마저도 야채가 다 자라지 않은 날은 맨밥만 먹어야했다.

가장 힘든 건 휴일도 보장하지 않는 노역이었다. 나비 씨는 ”한 달에 하루나 이틀을 겨우 쉬었고, 한 달 노동시간은 308시간에 달했다“고 말했다. 휴일 없이 하루 평균 11시간씩 일을 했다. 그는 또 "과로 때문에 자주 몸이 아팠지만 사장은 항상 아파도 참으라고 만 했다"며 "정말 몸이 아파서 병원을 찾았을 땐 2만 원이 넘는 왕복 택시비와 병원비, 약값도 모두 내 부담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일하고 나비 씨가 한 달 월급으로 받은 돈은 92만 원이었다. 하지만 이 농장에서 나비 씨와 같은 일을 한 한국인 노동자가 받은 돈은 200만원이 넘었다.

국네앰네스티한국지부와 이주노동연대 등 7개 단체는 18일 '세계 이주민의 날'을 맞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농ㆍ축산 업계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현재 제도와 법규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희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처장은 “정부가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위한 ‘고용허가제’를 만들었지만, 이 제도가 이주노동자들을 노예로 만드는 족쇄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법은 이주노동자들을 정식으로 '고용자'로 인정하는 대신 사업장 변경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사용자가 잔업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임금을 주지 않는 등 근로 계약을 위반해도 노동자들이 노예처럼 계속 그곳에서 일해야한다는 것이다.

우다야 라이(캄보디아) 이주인권연대 위원장은 “고용허가제 때문에 사장들은 항상 노동자들에게 말을 안 들으면 집으로 보내버린다고 협박을 일삼는다”며 “이주노동자들은 부당한 착취를 당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들의 노예가 돼야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행 법규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이재산 외국인이주ㆍ노동운동협의회 위원장은 “근로기준법 63조에 농ㆍ축산업 이주노동자들의 근로 환경을 관리감독하라는 조항은 빠져 있다”며 “때문에 이들은 휴식시간도 보장받지 못하고 상상할 수 없는 노동 강도로 노예처럼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옥순 국제식품연맹 사무국장은 “112년 전 조선인 노동자들은 가족들을 위해 멕시코, 하와이로 가 노예 취급을 받으며 일했다”며 “지금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들 단체는 기자회견 직후 두 달간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개선해달라는 내용의 시민 탄원서 2만8436장을 고용노동부 측에 전달했다.

조혜경 기자 wisel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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