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대통령 선거운동(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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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선거운동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우리는 이때 가서야 공화당으로부터「레이건」과 나 둘만의 TV 토론에 대한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토론은 선거 1주일 전 클리블랜드에서 갖기로 했다.
-다가올 토론에 관해「에이미」(딸)와 전화로 얘기했다. 1주일 가량은 그 애를 못 보게 될 것 같다.
「에이미」는 원자탄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우리는 1킬로 톤은 무엇이며, 1메가톤은 어떤 것인가를 놓고 의견을 나눴다. 「에이미」는 인질위기 등 국제문제들에 대해 마치 어른처럼 얘기했다. <일기 1980년10월26일>
나는「레이건」과 토론하는 중에 핵무기에 대한「에이미」의 우려를 말했다.
「레이건」과 신문기자들은 이것을 비웃었고 이 바람에「에이미」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반 핵론자가 돼 버렸다. 불유쾌한 일이었다.
후에 든 선거참모들로부터도 손해볼 말을 했다는 책망을 들어야했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적절히 표현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열 두 살 먹은 어린아이가 원자탄에 대해 그렇게 까지 염려하고 있다는 것은 핵무기의 위협이 모든 사람들의 의식 속에 얼마나 깊숙이 파고들어 있는가를 잘 나타내주는 예라고 믿었던 것이다.
-(토론에서)「레이건」은 대사를 외워 갖고 나와 단추만 누르면 말이 술술 튀어나오듯 했다. TV 시청자들에게 그는 나보다 좋은 인상을 주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에게도 말하고 싶은 주제들이 준비돼 있었다. 그것은 실제로 투표소에 발을 옮길 때가 가까워 옴에 따라 국민들의 마음속에 차츰 뚜렷이 부각되리라고 우리가 믿은 문제들이었다.
아뭏든 그는 그의 목적을 달성했고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이룬 셈이다. 다음주 화요일의 투표 결과를 보면 누구의 기본전략이 최선이었는가 가름될 것이다. <일기 1980년10월28일>
토론직후「레이건」은 조금 더 득세했지만「패트·캐둘」의 여론조사는 나머지 며칠동안에 우리가 실점의 대부분을 만회할 것임을 보여주었다. 주말께「캐들」은 다른 조사에선 우리가 여전히 약간 뒤지곤 있지만 자기조사로는「레이건」과 거의 비기고 있다고 보고했다.

<선거참모 책망 들어>
선거를 이틀 앞둔 일요일 이론 아침, 마질리스(이란 의회)는 결국 정족수를 채워 인질문제에 관해 서너 시간의 토의를 벌인 후 투표에 들어갔다. 상오 3시45분에 나는 마지막 유세를 위해 가있던 시카고에서「워런·크리스터퍼」국무차관의 전화를 받았다. 마질리스가 4개항을 승인키로 했다는 보고였다. 그 4개항은「크리스터퍼」가 이란 밀사「타바타바이」와 본에서 이미 협의했던 것들이었다. 결의안 중 재산청구절차나「샤」재산의 몰수에 관한 부분 등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소들이 있긴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아주 고무적인 것이었다.
나는 일정을 취소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로절린」과 「먼데일」부통령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머스키」국무장관으로 하여금 이 사실을 「레이건」과 「앤더슨」, 그리고 의회 지도자들에게도 알리도록 했다. 시카고를 떠나기 직전 나는 이란의회가「라자이」수상과 「바니-사드르」대통령에게 우리와의 합의사항을 집행할 권한을 위임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태양이 막 떠오르고 있는 동쪽방향으로 공군1호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돌아가던 그때를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조종석에서 승무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저 앞 구름사이로 해가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일출이었다. 나는 악몽과 같은 이란 인질사건이 빨리 끝나기를, 나의 판단과 결정이 현명한 것이었기를 빌었다.
나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일은 내 손을 떠난 것이다. 나의 정치적 앞날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구 저쪽의 무분별한 사람들에 의해 결정될지도 모를 운명이었다. 만약 인질들이 풀려난다면 내 재선은 확실해지겠지만 미 국민의 기대가 또다시 깨져 버린다면 승리는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인질 안 풀려 큰 상처>
백악관에 돌아와 이란에 관한 보고서롤 읽고 나는 우리와 이란의 견해차가 여전히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란의 제의를 아주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협상이 계속 되어야한다는 생각에서 회답을 준비해 그것을 테헤란의「게르하르트·리첼」서독대사에게 보냈다. 「리첼」대사는「라자이」수상과 즉각 면담을 갖도록 노력하겠다고 알려왔다.
이튿날 아침 일찍 나는「리첼」이 우리의 회답을「라자이」에게 전했으며「호메이니」가 과격파들에게 인질을 정부에 넘겨 줄 것을 지시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가도 더 이상의 소식은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 36시간의 유세를 떠날 즈음에 나는 여론조사에서 내가「레이건」을 거의 따라 잡았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이기기 위해서는 지지를 더 따내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미 후보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매스컴들은 인질보도만 떠들썩했다.
선거일인 11월4일 화요일은 마침 인질억류 1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월요일과 화요일의 매스컴들은 하루종일 지난 52주간의 슬픈 사건들을 요약·반복하는 이야기들로 넘쳐흘렀다.
국민들은 최근의 이란사태가 인질 석방에 부정적임을 깨달았다.
환멸의 분위기가 전국을 휩쓸었다.
-「패트·캐들」의 여론조사는 인질들이 석방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게됨에 따라 나의 인기가 크게 하강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모든 부동표는「레이건」쪽으로 흘러갔다. 우리가 오리건과 워싱턴주에 머물렀던 월요일 늦게 우리는 승리할 가망이 희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투표하기 위해 고향 플레인즈로 되돌아가는 길에「스투·아이젠스태트」(보좌관)가 기내의 내 자리로 찾아와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더니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를 감싸안고 위로했다. <일기 1980년 11월3일>
집에 돌아온 후 나는「로절린」과「패트·캐들」의 여론조사 결과를 논의했다. 아내는 별로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쁜 소식이었음에도 우리는 매우 평온한 기분이었다.
-우리들이 한 일들 중 어려웠고 논란도 많이 일으킨 것들은 결국 우리의 표마저 잃어버리게 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 쿠바 난민문제, 파나마 운하 협정, 대 중공 국교 정상화, 그리고 이란 인질사건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침공-특히 인질사건이 더욱 그러했다. 여기에 8개월간에 걸친「케네디」의 공격도 큰 상처를 안겨주었다.
이 때문에 나는 망연히 나를 밀었어야할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세력인 유대인·중남미 계인·흑인·빈민·노동자 등을 내편으로 되불러 둘이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투표를 마치고 나는 어머니를 뵌 뒤 워싱턴으로 되돌아왔다. 「워런·크리스트퍼」는 인질문제에 아무런 진전도 없다고 보고해왔다. <일기 l980년 11월 4일>

<일부 동지들에 피해>
저녁 7시30분부터 방송들은 선거에서「레이건」이 승리했다고 보도했다. 밤 9시30분쯤 나는 셰러튼 워싱턴 호텔에 나가 패배를 인정하는 짤막한 연설을 했다. 그러나 서부해안의 투표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급하게 해버린 이 연설은 나중에 비난을 받았다. 서부 쪽의 민주당 후보자들에게 피해를 주었을 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주=총선거에선 대통령뿐 아니라 상·하원의원, 주지사, 연방 및 지방의 선거직들도 선출한다). 그것은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나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기다리는 못난 패배자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는 패배의 암울한 구름 사이로부터 한 가닥 위안의 빛줄기를 찾아내야만 했다. 어쨌든 선거운동은 끝났다는 위안이 바로 그것이었다. 앞으로 두 달 반 동안 해야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나는 입후보자가 아닌 대통령으로서 이 의무들을 수행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작은 은총에 하느님께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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