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방폐장 건설, 이제 시작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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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원전수거물관리시설 유치에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뛰어드는 등 예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8월 31일자로 유치신청을 마감한 결과 경북 경주시와 포항시, 전북 군산시에 이어 경북 영덕군이 산업자원부에 유치 신청서를 제출함으로써 원전수거물관리시설 선정을 위한 경쟁구도는 4파전으로 압축되었다. 오랫동안 난항을 겪어오던 국책사업이 해결의 실마리를 보임에 따라 많은 원전 종사자와 국민이 안도하고 있다.

그러나 냉정히 보면 이제 겨우 첫 단추를 끼웠을 뿐이다. 원전수거물을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견해와 그렇지 못하다는 반핵론자들의 주장이 여전히 대립하고 있으며, 유치를 위한 찬반투표 과정에서도 주민들 간 갈등과 반목이 예상된다. 유치를 희망하는 지자체 인근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심상치 않아 새로운 갈등을 야기할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럴당 70달러를 넘나드는 유가와 기후변화협약에 대처해야 하는 우리에게 원전수거물관리시설의 건립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 고리원자력발전소 상업운전 이후 현재 20개의 발전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원자력발전소의 운전에 따른 부산물인 중저준위 수거물은 원전부지 내 저장시설에 보관해 왔다. 또 병원.연구기관.산업현장 등에서 사용되는 방사성 동위원소에 의한 수거물은 원자력환경기술원에 임시 보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2008년 울진을 시작으로 방사성폐기물 처분장이 포화상태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내년에 시설공사에 착수한다 하더라도 2008년 완공까지는 일정이 너무 빠듯해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는 상황이다.

원자력은 가장 값싸고 환경친화적인 에너지다. 원자력 에너지로부터 얻어지는 방사성 동위원소는 국민의 질병치료와 건강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폐기물을 처리하기 위한 원전수거물관리시설의 건설과 운영은 지금 우리 세대가 떠맡아야 할 책임이다.

프랑스나 영국.스웨덴 등 선진국에서는 원전 건설이나 방사성폐기물 처분장(방폐장) 건설 문제를 놓고 우리나라처럼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이들 나라 정부가 에너지 수급사정이나 원자력의 실상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공개하고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데다 국민이 정책의 투명성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한 원자폭탄 피해국인 일본이 벌써 중저준위 방폐장은 물론 우라늄 농축 공장, 재처리 시설, 고준위 폐기물 저장시설 등을 건립해 가동하고 있는 것은 아직 방폐장 부지조차 구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실정에 비추어 볼 때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이제 우리는 '원전수거물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일'에 보다 냉정하게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과 지역주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국가 전체의 이익이 최상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와 시행주체들은 부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정보를 정확하고 투명하게 공개해 정책의 신뢰성을 쌓아야 한다. 정직한 홍보를 통해 국민이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해당 지역이나 인근 지역 주민들은 전력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내 주변에 원전이나 방사성폐기물 처리장이 들어오는 것은 안 된다'는 이율배반적인 태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원자력발전소가 운전되는 한 원전수거물관리시설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불가결한 시설이다. 건설이 늦으면 늦을수록 피해는 우리 국민 전체에 돌아간다.

원전수거물관리시설 유치에 나선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주민들의 용기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아울러 부디 첨예한 대립을 거두고 마음을 비운 채 객관적 사실과 근거에 입각하여 합의점을 찾아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강동훈 한전기공㈜ 원자력처 원자력1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