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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직의 바둑 산책] 김지석 "우주 다룬 다큐 보면서 승부 부담감 극복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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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승부는 긴장되고 힘든 일이다. 김지석 9단은 자연 속 생명의 경외를 느끼면서 승부의 부담감을 극복했다. 사진은 지난해 GS칼텍스배 결승 종국 장면. [중앙포토]

프로기사 김지석(25) 9단의 기세가 놀랍다. 올해 세계대회에서만 16승 1패다. 그중 두 판은 지난 10일 끝난 삼성화재배 결승전에서 얻은 승점이다. 김 9단의 세계대회 첫 우승이었다. 그는 어디까지 뻗어나갈 것인가. 25일 춘란배 세계대회 8강전에 출전하는 그는, 2015년 2월 LG배 결승전에서 박정환(21) 9단과 승부를 겨룬다. 14일 서울 홍익대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 우승을 축하한다. 특히 2국의 마지막 싸움이 대단했다. 수를 다 읽었나.

 “고맙다. 수를 끝까지 다 읽은 건 아니었다. 그리 두어야 한다고 결단했다. 때로는 감(感)을 따라야 한다.”

  - 승부는 고생길이다. 언제 가장 힘들었나.

 “초등학교 1~3학년 부모를 떠나 서울에 와 있을 때다. 입단 후 2009년 첫 번째 타이틀인 물가정보배를 거머쥔 직후 천원전 결승에서 박정환(21·9단)에게 3대0으로 지는 등 몇 번 연속 패배했을 때도 힘겨웠다. 주변에서 바보라고 하는 듯했다. 후배에게 무릎을 꿇어 자괴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정환이와 함께 복기도 하고, 스스로 돌아보면서 이겨냈다. 지금 돌아보면 정환이에게 참 많이 배웠다.”

 - 어릴 때부터 황태자로 불리는 등 천재 소리를 들었다. 예부터 소년등과(少年登科·소년 때 과거 합격하는 일)는 고약한 일이라고 할 정도로 부담이 큰 일이다. 어떻게 이겨냈나.

 “물론 어려웠다. 자연 다큐멘터리나 생명의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우주를 바라보면서 힘을 얻었다. 칼 세이건 원작의 ‘코스모스’도 봤다. 우주의 너비를 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생각했다. 승부를 바라보는 데 큰 힘을 얻었다. 조급함을 벗어나는 계기였다.”

  - 10년 전부터 세계대회에 나가도 기껏해야 8강이고 4강도 겨우 두 번 올랐다. 징크스인가.

 “예전엔 세계대회 8강이나 4강에 올라가면 뭔가 완벽한 바둑을 두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어깨가 무거웠다. 아버지(김호성·55·전남대 공대 교수)가 대국 전에 마음을 관조해보라고 하셨다. 불안하면 불안을, 조급하면 조급함을, 집중이 안 되면 안 되는 것을, 다만 관조만 하라고 하셨다. 도움이 컸다.”

  - 바둑이란 게 하룻밤에 문득 느는 건가.

 “실력은 천천히, 점진적으로 는다. 하지만 승부를 바라보는 안목 같은 것은 문득 뛰어넘을 수 있다. ”

  - 한계를 알면 마음이 편해진다. 대신에 대충 둘 수도 있는데.

 “그건 아니다. 3시간 바둑을 두면 약간 빨리 두는 편인데, 답이 꼭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속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속기는 아무래도 실수가 많다.”

  - 기풍과도 관련이 있다. 자신의 기풍은.

 “ 적극적이다. 공격적인 것과는 다르다. 어릴 적에는 더 적극적이었던 거 같다.”

 - 거북한 상대가 있다면 누구일까.

 “적극적인 기풍을 가진 상대다. 예를 들어 스웨(時越·23·중국 랭킹 1위) 9단이다. 하지만 이번 준결승에선 스웨가 부담을 가졌던 듯하다(준결승에서 김 9단은 스웨를 2대0으로 눌렀다). 랭킹 1위는 무서운 책임감이 따르는 고약한 자리다. 정환이도 랭킹 1위라 부담이 있을 것이다. 형(선배)들이 앞서 잘해 주었다면 정환이도 힘이 덜 들 텐데 미안하다.”

 김 9단은 어울리는 선후배의 폭이 넓다. 박정환은 21살이고, 이번 결승전이 열린 중국 시안(西安)까지 따라간 목진석 9단은 34살이다. 선후배와 가까이 지내는 일은 여유가 있어야 한다. 김 9단은 결승 직후 인터뷰에서 “탕웨이싱(唐韋星·21) 9단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고 했다. 대국 중 생기는 적개심 은 시합이 끝나도 당장 사라지지 않는다.

 - 바둑 공부는 어떻게 하나.

 “사활 문제를 많이 본다. 사활을 보면 초반 감각도 좋아진다. 좋은 모양과 나쁜 모양에 대해 감각이 발달한다. ”

 - 닮고 싶은 기사가 있나.

 “최철한(29) 9단이다. 바둑의 내용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참 따르고 싶은 선배다. 감화되는 게 많다.”

  - 하루 일과를 소개한다면.

 “매일 오전 10시 한국기원 국가대표 연구회에 나간다. 오후 5시까지 공부하고 약 1시간 더 기원에 머문다. 집은 기원 근처 황학동이다. 집에 오면 6시쯤, 7시 정도까지 저녁식사를 한다. 집에서는 바둑 공부하지 않는다. 밤 10시까지 이것저것 마음 놓고 지낸다. 잠은 7시간 정도 잔다.”

  - 몸이 탄탄한데 운동은 뭘 하나.

 “배드민턴을 시작한 지 1년쯤 됐다. 예전엔 문득 하고 싶어 유도를 2년가량 했다.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됐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하고 싶다.”

  - 아무거나 잘 먹는 거 같은데.

 “무엇이든 잘 먹고 어디서나 잘 지낸다. 살림을 맡은 아내의 내조가 고맙다. 다만 카페인 들어간 음료는 뭔가 싫다. 커피는 안 한다. 아내는 약간 다르다. ”

  - 연애 얘기도 궁금하다.

 “약 2년 했다. 결혼은 자연스럽게 했다. 내가 먼저 하자고 했던 듯하다. ”

 - 앞으로의 희망은.

 “ 나중에 승부에서 벗어날 나이가 되면 수학을 공부해보고 싶다.”

문용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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