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하게 직접 통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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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l910년의 강점이 있기 전부터 소위 토지조사 사업이라는 토지약탈정책이 추진되어 봉건적 농민수탈이 자행되었으며 그 결과 토지를 잃은 한국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간도와 일본등지로 유민화되어 갔다. 한말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 민족의 평균 신장이 1m80㎝였다. 그런 장신민족이 오늘날 1m70㎝도 못되는 단신민족이 된 것은 쌀의 약탈로 인한 만성적 영양실조 때문이었던 것으로 풀이되고있다.
일제 강점기에 그들이 시도한 범죄적 행동가운데 가장 잘 위장된 분야가 이른바 문화정책이었다. 왜경 말기의 민족문화 말살정책까지 들것은 아마 없으리라. 1910년대의 문화정책만 보더라도 그들이 처음부터 무엇을 어떻게 하려 했는가를 뚜렷하게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우리를 민족의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빠진 우민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l910년 그들이 세운 관립 고등보통학교가 셋, 관립 여자고등보통학교가 하나, 학생수는 모두 합해서 8백30명밖에 안되었다. 사립학교는 시설이 나쁘다는 이유로 대폭 감축하고 모든 애국적 교과서를 불살라버렸다. 이해 11월에 헌병·경찰을 총동원하여 서울 종로일대의 서점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서점·향교·서원, 심지어는 개인집 서재까지 급습하여 민족의 고전을 몰수하고 소각하였다. 이때 소각된 서적이 무려 20여만부에 이르렀으니 이야말로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아니고 무엇이었는가.
안중근의사는 두 동생에게 하나는 학문, 하나는 식산을 하라고 유언하였었다. 이것은 한말의 애국 계몽정신을 드러낸 말이었으나 일제는 이같은 뜨거운 민족의 열망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이 바라던 것은 발전이 아니라 영원한 예속이었다.
한 애국 계몽주의자는 이렇게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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