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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와 순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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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우선 안됐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오늘로 58일째 감옥에 갇혀 있는 미국 뉴욕 타임스(NYT) 기자 주디스 밀러(57.사진) 얘기다. 밀러는 취재원을 밝히길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법정모독죄를 자초했다. 미국 역사상 취재원 밝히길 거부한 언론인의 수감 기록(1972년 46일)을 깼다.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 등의 지성들이 석방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10월까지 풀려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밀러의 억울한 사연을 찬찬히 뜯어보면 "미국 정치도 우리와 다를 바 없구나"라고 느껴진다. 사연은 2002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라크와의 전쟁을 결심하고 있던 딕 체니 부통령은 영국 정보기관의 첩보를 입수했다. 사담 후세인이 아프리카 니제르에서 핵무기 제조용 우라늄을 사들이려 한다는 것이다. 중앙정보국(CIA)은 아프리카에서 오랜 외교활동을 해 왔던 조셉 윌슨을 현지로 파견했다. 윌슨은 현지를 실사하고 돌아와 "엉터리 정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3년 연두교서에서 윌슨의 보고와 반대로 "후세인이 니제르에서 우라늄을 사들이려 한다"고 만방에 공표한 다음 3월에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자 윌슨이 7월 6일 NYT에 "니제르와 이라크 간에 우라늄 거래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문제는 윌슨의 부인 발레리가 현역 CIA 고급 비밀요원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부시의 최측근 모사꾼 칼 로브가 등장했다. 로브는 같은 텍사스 출신으로 20년 지기인 보수 칼럼니스트(로버트 노박)에게 윌슨 부인의 정체를 흘렸다. 로브는 통화에서 윌슨의 니제르 파견은 그의 아내 발레리가 제안한 것이며, 윌슨의 여행이 다소 특혜성 유람이란 뉘앙스를 풍긴 것으로 알려졌다. 노박은 7월 14일 칼럼에서 "정부 고위직에 따르면"이라며 이를 폭로했다. 로브는 노박 외에 시사주간 타임지 기자와 NYT의 주디스 밀러에게도 비슷한 내용을 흘린 것으로 알려졌다. 로브가 윌슨에게 보복하기 위해 부인 발레리의 신상을 교묘히 공개한 것이다. 모사꾼 로브는 불리한 정보를 흘려 상대방을 해코지한 경력으로 이미 악명 높았다.

비밀요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은 불법이다. 특별검사가 임명돼 수사에 들어갔다. 발레리의 신상을 알고 있던 기자들이 소환됐다. 정작 기사를 처음 쓴 노박은 법정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노박에 이어 두 번째로 기사를 쓴 타임지 기자는 법정에서 "로브로부터 들었다"고 증언하고는 법정을 걸어 나왔다. 로브는 법정에서 "어디선가 발레리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풀려났다.

엉뚱하게 수갑을 찬 것은 여기자 밀러다. 밀러는 취재는 했지만 기사는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취재원을 공개할 수 없다"며 증언을 거부했다. 법원이 구속을 결정하자 "기자로서 취재원과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다"며 호송차에 올랐다.

사실 밀러가 밝혀야 할 취재원(로브)은 다른 기자들의 증언으로 이미 확인됐기에 굳이 수감돼 있을 필요도 없다. 정작 기밀을 공개한 로브는 백악관에 앉아 있는데, 밀러는 로브를 보호하기 위해 갇혀 있는 우스운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밀러는 '언론 자유의 순교자'란 칭송을 받고 있다.

밀러는 로브가 구사한 마키아벨리즘의 희생자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18장에서 '야수의 힘'을 강조하면서 "군주는 사자인 동시에 여우여야 한다"고 적었다. 사자처럼 늑대를 물리칠 힘을 가져야 하고, 여우처럼 덫을 피할 줄 아는 머리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로브는 사자처럼 정적을 때려눕히고 여우처럼 법망을 피했다. 물론 로브는 정상배(Politician)이지 정치가(Statesman)는 아니다. 미국에서도 현실정치는 정상배의 몫인 듯하다.

로브보다는 밀러를 부러워하고 싶다.

오병상 국제뉴스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