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를지키며」... 국내 독점 발행(5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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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크리스머스 이틀뒤 평화를 갈망하는 세계에 또 한번 충격을 준 사건이 발생했다. 성탄절 휴일을 이용해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기습, 침공한것이다.
79년5월이래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 소련군이 계속 증강되고 있음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소련축에 대해 이런 움직임이 작은 한 이웃나라의 정치문제에 개입하려는 의도에서 비롯 된것이 아니냐고 경고해온 터였다.
9월까지는 수백명의 소련군사고문만이 수도 카불주변에 주둔했다. 소련축은 미국과 다른 국가들 에대해 군사고문만의 파견은 아프가니스탄 지도자들이 질서유지를 위해· 요청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루 2백인회 공륜>
그러나 소련군은 크리스머스 휴일을 틈타 아프가니스탄에 대규모 범력공수를 개시했다. 불길한 사태진전을 보고받은 즉시 나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백악관으로 돌아왔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의 현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지난 24시간동안에만 무려 2백15회나 병력이 공수됐다. 처음엔 한두 여단 만위로 이동하더니 이제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중인 소련군 및 군사고문만의 규모가 8천에서 1만명이나 되는 것 같다.매우 심각한 사태로 보지않을수 없다. <일기 1979년 12윌27일>
소련은 아직도 그들의 행동이 국내 보안을 강화해 달라는 아프가니스탄 지도자들의 요청에따라 취해진 것이라고 주장 하지만, 그러한 대규모 작전에는 분명히 다른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과거 소련은 바르샤바 동맹국들을 계속· 지배하기 위해 소련군을 주저하지 않고 동원했으며, 다른 지역에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쿠바나 베트남의 대리군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48년2월 이용하는것도 서소련이 채코슬로바키아 정부를 전복시키고 그곳에 소련괴뢰점부를 수립한 이래 소련이 그들의 영합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프가니스탄침략은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련군의 직접적인 공격이었으며 아프가니스탄 지도자들은 거대한 이웃국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근근히 독립을 유지해나가려고 애써왔다.
소련지도자들의 주강을 빌면 소련군의 개입을 요청했다면 아프가니스탄의「하피즐라· 아민」대통령이 그러나 곧바로 암살되었으며 소련과 한통속으로 그곳에서 숨어지내오던 한 아프가니스탄지도자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같은 행동은 지극히 야만적 이었으며 인근 다른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침략위험도 명약관화한 것이어서 무서운 결과가 예상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점령으로 소련은 이란과 파키스탄사이 깊숙이 침투로를 확보하게 될 것이며 폐르시아만 지역의 풍부한 유전지대와 세계의 에너지 등급 선박들이 지나가야만하는 주요한 수로에도 치명적인 위협으로 등장하게 될것이다.
나는 하트라인을 통해「브레즈네프」소련서기장에게 나의 대통령 재직동안 가장 강력한 항의를 보냈다. 나는 그에게 아프가니스탄침략은 『평화에 대한분명한 위험』이며『미-소관계에 근본적인 전환점을 기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소련이 현재 진행중인 행동을 되돌리지 않는다면 전반적인 미-소 관계에 파국을 몰고올 것입니다. 본인은 각하에게 소련군을 철수시카고 아프가니스탄의 국내문제에 간섭을 중단하는 건설적인 행동을 취해줄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아프간인 저항 완강>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지도자들이 외부로부터의 무력침공을 막아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이 동원된 것이라고 거짓 주장을 되풀이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는『아프가니스탄이 소련에 요청한 병력동원의 이유가 사라지면 즉시 소련군을 그곳에서 철수 시키겠습니다』 고 앞서의 약속을 거듭해 말했다.
그런 약속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더많은 병력을 국경너머로 쏟아 부어 아프가니스탄 주둔군은 약 8만명으로 증강됐다.
대부분 소규모 낡은 무기로 무강한 자유투사(주=아프가니스탄 회교저항군) 는 놀랍게도 완강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저항을 해나갔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용맹스런 투쟁을 계속할수 있다면 소련 지도자들은 길고 지루하고 값비싼 전쟁을 치룰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미국의회 지도자들과 함께 이문제를 검토하면서 언론계 주요 인사들 에게도 브핑리핑을 하여 미국인들이 소련침략의 전략적인 면을 이해할수 있도록했다.나 는 유럽의 동맹국,유고슬라비아의 「티트」 ,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 대통령, 이슬렘국가지도자둘` 그리고 특히 파키스탄의 「하마드·지아·올하크」 대통령과 더불어 소련침공의 효과적인 대처방안을 긴밀히 협의했다.
이 사태는 내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발생한 가장 심각한 국제적 사건이다.
소련이 이 사건을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이롭지 못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침략과 파괴라는 보다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계 될것이다.<일기1980년1월3일> 우리가 취할수 있는 조치는 군사·경제·정치등 3가지면이 있었다. 직접적인 군사행동은 바람직하지는 않았으나 미국의 국가안보회의(NSC)에서는 생각 할수있는 모든 대안을 마련해놓았다. 경제적 제재조치나 아프가니스탄 자유투사들 에대한 간접적 군사지원도 가능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소련과의 교역중단이나 모스크바 올림픽 참가거부는 미국민들의 생활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될 조치들이었다.
소련의 침략행위는 80년 미 대통령 선거에 나서야하는 나 자신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백악관 안에서는 내가 아이오와주에서 열리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들과의 TV토론에 참가하는 문제로 논란이 거듭됐다. 아이오와주는 곧 주당원회의를 소집하기로 되어있었으며 그곳에서의 투표길과는 예비선거의 서막으로 「케네디」 「브라운」등과 경쟁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의 위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선거전을 시작 하는것은 좋지 못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정치활동을 늦추는 것은 우리가 교착된 상황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보는 것으로 세계에 비춰질 우려가 있어 나는 아이오와토론에 참가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다음날 나는 아이오와에는 가지 않기로 결심했으며 그곳의 지지자들을 불러 이유를 설명했다. 몇몇 사람은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부분은 내가 옮은 결점을 내렸다고 판단했다. 무단복제·출판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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