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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편네"라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TV를 보며 신나게 웃어젖히는 남편의 얼굴을 보면서 참으로 세월은 덧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자기 나좀봐요. 우리가 언제 만났죠? 비가 오는날이죠. 그때가 여름이었던가요. 난 참 너무 센티해서 탈이야. 그놈의 비때문에 우리가 만났단말이에요.』
나는 결국 비가 괘씸하다는듯이 비내리는 창밖의 풍경을 닫아버리듯 창문을 홱 닫고는 코피잔을 들고 남편에게 갔다.
『아니 왜이래, 이 여편네가. 갑자기 옛날 일을 왜 .』
나는 그만 「여편네」라는 소리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애를 하나 낳고나니 이젠 「마누라」니 「여편네』는 남정네들 끼리 모인자리면 늘 듣던말이라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바로 지금 옛 추억을 더듬으며 꿈을 쫓고있는 나에게 「여편네」라는 말은 나를 무참하게 현실로 끌어내리고 만것이다.
『그래 맞아요. 나는 당신의 여편네예요. 하지만 여편네가 무슨뜻이죠? 당신은 나에게 뭐예요. 친한 친구한테 모처럼 전화가 걸려와서 영화구경 가자니까 당신이 뭐랬어요? 그친구 바람났으니까 절대 다시 만나지말라고 그랬죠. 당신은 옛날에 나를 처음 만났을때 내가 영화를 참 좋아한다니까 당신도 영화가 취미라더니 왜 새빨간 거짓말을 했죠? 주말마다 낚시에 미쳐다니면서 .』
이렇게 시작한 나의 불평에 남편은 져야함을 알았는지 「여편네」소리는 무조건 취소한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 대신에 멋진 영화한편도 같이 보러가자고 했다. 나는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옆구리 찔러 절받기예요』하며 얼른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말하는 억양이 높았다 낮았다 고르지 못한것이 제딴에도 심상치 않았던지 세살짜리 딸 꼬마는 『아빠! 엄마하고 왜 싸웠어』하며 회초리률 찾아들고 나왔다. 결국 우리 가정엔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
이미 다 식어버린 코피를 다시 데우려고 부엌으로 들어서며 나는 가끔 아무렇지도 않은일에 짜증을 내고 투정을 부리는 나를 발견했다. 이게 바로 「여편네화」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먼 홋날 누군가 타성에 젖어버린 쉰목소리로 나를 부르지 않도록 나는 오늘하루를 최후의 시간인양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멱어본다. <서울서대문구 북가좌동420의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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