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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발자국 추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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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경기도 화성군의 논바닥.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구경꾼 사이로 손이 뒤로 묶인 채 쓰러져 있는 여인의 시신이 보인다. 우왕좌왕하는 경찰, 현장을 밟고 다니는 주민, 논두렁에서 보기좋게 미끄러지는 감식 요원…. 살인범이 남겼을지 모를 발자국마저 농군이 모는 경운기 바퀴에 깔려 뭉개진다.

최근 개봉된 영화 '살인의 추억'은 이렇게 어수선하게 시작된다. 10여년 전 일어났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 도입부의 족적(足跡) 훼손 장면은 앞으로 수사가 사정없이 헤맬 것임을 암시했다.

족적 추적은 지문 채취, 몽타주 작성, 신체분비물 수거 등과 함께 강력범죄 수사의 첫걸음이다. 범죄자들은 장갑을 끼거나 손끝에 매니큐어를 발라 지문을 남기지 않을 수 있지만 족적을 숨기기는 쉽지 않다.

수사관들은 발자국을 분석해 범죄자의 몸무게와 키, 심리상태까지 알아챈다. 발자국이 흙속 깊이 들어가 있으면 뚱뚱한 사람, 앞.뒤꿈치 부분에 끌린 흔적이 있다면 지쳐있는 사람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에서 명탐정 셜록 홈스는 살인현장에 난 발자국의 크기.보폭.모양 등을 보고 살인자의 인상착의는 물론 직업까지 추리해 낸다.

족적에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잠재흔)이 있다. 괴한이 마당을 가로질러 집에 침입한 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면 마당에는 대개 알아볼 수 있는 신발자국이 찍히고, 거실 바닥에도 양말에 묻은 작은 먼지로 인해 잠재흔이 남는다.

이 흔적에 비스듬히 광선을 비추면 발 모양이 드러난다. 범인이 피묻은 발자국을 닦아냈다 해도 특수약품.광선을 써 잠재흔을 찾아낼 수 있다.

최근 유흥업소 사장을 잔인하게 죽인 용의자가 자신이 남긴 발자국 때문에 잡혔다. 경찰은 피가 묻은 작은 발자국을 찾아내 탐문 수사 끝에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발이 정상보다 작은 용의자를 체포했다고 한다.

입과 코에 '야콥슨'이라는 후각기관이 발달한 구렁이는 쥐의 발자국에서 풍기는 냄새를 추적, 한해에 집쥐 1백여마리를 잡아먹는다. 족적이 화근이 되기는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도 마찬가지다.

재임 때 남긴 어지러운 족적이 정권이 끝나거나, 자리에서 물러난 뒤 밝혀져 화를 입는다. 김방림.이남기.손세일…. 당장 드러나지 않더라도 발자국은 남고, 추적자는 있게 마련이다.

이규연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