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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가 연기하는 여배우의 욕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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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만큼 다양한 얼굴을 가진 존재가 세상에 또 있을까. 아름다운 피사체, 레드카펫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스타, 연기(演技)로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는 예술가, 유리구슬처럼 예민한 인격체….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원제 Clouds of Sils Maria, 12월 18일 개봉,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와 ‘맵 투 더 스타’(원제 Maps to the Stars, 12월 25일 개봉,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는 그 모든 얼굴의 총체,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 영화들이 특별히 주목한 여배우의 얼굴이란 무엇일까.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마리아 줄리엣 비노슈
“영원히 젊고 매력적이고 싶어”

마리아는 성공한 중견 배우다. 20년 전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와 그것을 각색한 동명 영화의 주연으로 발탁돼 주목받은 뒤,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며 세계적인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도 할리우드 수퍼 히어로 영화의 출연 제의가 빗발치고, 세계 각국의 패션 잡지가 그의 사진을 찍기를 원한다. 뛰어난 연기력을 자랑하는 유럽 출신 배우로 세계적인 활동을 펼친다는 점에서 마리아는, 그 역을 연기하는 줄리엣 비노슈를 빼닮았다.

여기서 마리아는 흥미로운 제안을 받는다. 20년 만에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에 다시 출연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역할이 다르다. 20년 전에는 시그리드 역을 맡았다. 이번에는 헬레나 역이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회사를 경영하는 중년 여성 헬레나가 스무 살의 여성 시그리드의 젊음과 매력에 빠졌다가 그에게 버림받고 자살하는 내용이다. 마리아는 영원히 매력적인 시그리드로 남고 싶은 마음에 그 제안을 거절하지만, 결국 연극 연출가(라르스 아이딩어)의 설득에 넘어간다. 이 연극의 원작자이자 초연 연출가가 머물렀던, 알프스 산맥의 작은 마을 ‘실스 마리아’에 자리한 집에서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과 함께 대사 연습을 하는 마리아.

그는 이미 헬레나 역을 수락했음에도 그 역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친다. 열심히 연습을 하다가도 못 참겠다는 듯, 헬레나는 그저 무기력한 인물이라는 둥 이 이야기는 비현실적이라는 둥 연극을 깎아내린다. 상처 받는 헬레나가 시그리드보다 훨씬 인간적이라는 발렌틴의 의견은 무시하고, 이번 연극에서 시그리드 역을 맡은 할리우드의 스캔들 메이커 조앤(클로이 모레츠)을 발렌틴이 옹호하자 이렇게 묻는다. “(조앤이) 나보다 더 좋아?”

‘말로야 스네이크’는 원래 실스 마리아에 있는 말로야 고개를 거대한 구름이 휘감아 흐르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구름이 꼭 뱀 모양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분명 구름은 움직이는데 풍경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연출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한 말이다. 어렵게 그 풍경을 직접 목격한 마리아는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자신은 더 이상 시그리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 이상 젊음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그것이야말로 나이를 초월해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되는 첫 걸음이라는 사실을. 그건 비단 여배우에게만이 아니라, 나이 들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절실한 깨달음이다.

‘맵 투 더 스타’의 하바나 줄리앤 무어
“더 큰 스타가 되고 싶어”

모두가 스타가 되려 한다. 아니면 스타와 어떻게든 가까워지려 한다. 그건 이미 스타가 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하바나는 할리우드의 스타 배우다.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다. 이름난 영화상에서 여우조연상을 탄 적도 있을 만큼 연기력도 인정받았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경력이 시들해지고 있다.

지금 그는 옛날 영화 ‘스톨른 워터’의 리메이크작에 필사적으로 출연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는 원작 영화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젊은 시절 맡았던 배역을 연기하고 싶다. 하바나의 어머니(사라 고든)는 전설적인 배우로, ‘스톨른 워터’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러다 1976년 화재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하바나는 어머니가 약물 중독이었고, 자신을 육체적·성적으로 학대했었다고 믿는다. 그는 지금도 그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하바나는 때때로 젊은 모습을 한 어머니의 환영을 본다. 그 환영은 하바나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난 연기도 잘했고, 젊고 우아했어. 넌 걸레처럼 더럽고 추잡하지!”

하바나는 어머니를 증오하는 동시에 어머니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 그건 우리가 스타에게 품는 이중적인 마음과 다를 바 없다. 실제로는 마주친 적도 없는 스타에 대해 세상 누구보다 잘 안다는 듯 깎아내리면서도, 그의 특별하고 화려한 삶을 동경한다. 누군가에게 이미 그런 존재인 하바나 역시 더 환하게 빛나는, 더 오래 빛나는 별이 돼야 한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불안은 그를 괴물로 만든다. 하바나는 그가 원하는 역에 캐스팅됐던 배우(제인 헤이트미어)가 아들이 죽는 사고를 겪는 바람에 대신 영화에 합류하게 된다. 이 소식에 신이 난 나머지 하바나는 젊은 비서 애거서(미아 바시코브스카)와 함께 그 아들 이름까지 외치며 노래하고 춤춘다. 하지만 불안은 급기야 그를 파괴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어머니처럼 수시로 약을 과다 복용한다. 기분에 따라 애거서에게 변덕을 부리고, 애거서의 젊음을 질투해 그의 남자친구 제롬(로버트 패틴슨)을 유혹한다. 이 모든 행동은 그를 끔찍한 최후로 안내한다. “할리우드는 매혹적인 동시에 역겨운 세계다. 그 이중성이 할리우드를 강력하게 만든다.” 이 영화를 연출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말이다. 바로 그곳에 우리의 스타들이 살고 있다.

여배우의 또 다른 얼굴

여배우들(2009, 이재용 감독)

나이도 경력도 모두 다른 여배우 여섯 명이 모인 패션 잡지 화보 촬영장. 이 영화에 출연한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은 이재용 감독과 함께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각자 본인의 실명을 딴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 덕에 배우 각각의 본래 성격과 이미지가 극에 적극 반영됐다. 특히 여장부 이미지의 고현정과 새침한 이미지의 최지우가 분장실에서 맞붙는 장면은 소문으로나 듣던 여배우들의 신경전을 직접 보는 듯한 짜릿함을 안겨준다.

노팅힐(1999, 로저 미첼 감독)

할리우드의 스타 배우 안나(줄리아 로버츠)와 평범하고 소심한 영국 남자 윌리엄(휴 그랜트)의 사랑 이야기. 늘 파파라치를 달고 다니는 안나는 윌리엄이 감히 연애 상대로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다. 그런 안나가 윌리엄이 운영하는 서점 문을 우연히 열고 들어오고, 결국 그와 사랑에 빠진다. 스타와 평범한 남자의 로맨스라니, ‘로마의 휴일’(1953, 윌리엄 와일러 감독)과 마찬가지로 로맨틱 코미디가 꿈꿀 수 있는 최고의 판타지다.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데이비드 린치 감독)

나오미 와츠와 로라 해링이 각각 1인 2역으로 등장한다. 와츠는 베티와 다이앤 역, 해링은 리타와 카밀라 역이다. 베티-리타, 다이앤-카밀라의 이야기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인다. 특히 할리우드에서 고군분투하는 두 여배우 다이앤과 카밀라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하지만, 카밀라는 주연이 되기 위해 다이앤을 버리고 영화감독과 결혼하고, 다이앤은 카밀라를 청부 살인한다. 할리우드는 이 영화에서도 욕망의 용광로로 묘사된다.

바스터즈:거친 녀석들(2009,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4년 프랑스 파리. 독일 최고의 인기 여배우 브리짓(다이앤 크루거)이 이곳에 나타난다. 바로 전쟁을 하기 위해서다. 사실 그는 영국군의 스파이로, 독일의 선전영화 시사회에 참석하는 히틀러(마르틴 부트케)의 암살 작전에 투입됐다. 스파이 활동은 목숨을 건 연기인 셈이다. 이를 위해 그는 직접 총을 쏘고, 깁스를 한 다리를 끌고 시사회에 참석한다. 그리고 악랄한 한스 대령(크리스토프 왈츠)에게 정체를 들켜 죽임을 당한다.

글= 장성란 매거진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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