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인정 투쟁’ 단계 진입 … 전근대적 주종 의식 버려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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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호 03면

김호기(54·사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른바 ‘땅콩 회항’ 논란으로 불거진 국민적 분노에 대해 “우리 사회가 ‘사회민주화’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 국가의 산업화와 민주화가 진행되고 나면 근대적 계약관계에 따른 위계(位階)가 존재하긴 하지만 동등한 인간으로 승인받고자 하는 ‘인정(recognition)’의 욕구가 발현된다는 분석이다.

김호기 교수가 분석한 확산 배경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이번 사태를 두고 “직원을 자유로운 계약에 따라 일하는 자본주의적 기업 노동자가 아니라 신분적으로 예속된 봉건주의적 머슴으로 바라보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진 교수 말대로 근대사회의 중요한 특징은 계약인데 아직 우리 사회에선 계약관계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다른 위계관계에 있지만 주종(主從)관계는 분명히 아니다. 인격적으로 무시당하는 것에 대한 ‘을(乙)’들의 거부라고 봐야 한다.”

-왜 국민적인 분노가 일어났다고 보는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지난번 남양유업 사태처럼 자영업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이 큰 것이다. 둘째로는 물질적 피해 못지않게 인격적 피해를 봤다는 점이다.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인정투쟁(The Struggle for Recognition)’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경제적 분배투쟁 못지않게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이 현대사회에서 중요하다는 의미다. 동등한 인간으로 승인받고자 하는 욕구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진행되면 어느 사회에나 인정투쟁 단계로 접어든다. 우리 사회에서도 인정투쟁이 본격화하고 있는 셈이다. 셋째로 정보사회로의 진전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을’들의 입장을 표출할 사이버공간이 생긴 것이다. 이 세 가지가 결합되면서 이번 ‘땅콩 회항’ 사태가 국민적 공분으로 발전한 것 아닐까.”

-경제적 차별보다 사회적 차별이 견디기 어렵단 의미인가.
“인간 존엄이 무시되고 훼손되는 게 더 우리를 괴롭게 하는 거다. 우리 사회가 빠른 산업화를 이뤘지만 아직 전근대적 가치가 남아 있다. 지주가 소작인 부리듯 하는 것 말이다. 오히려 현대화된 조직에선 ‘쿨’하게 관계가 형성되는데 ‘3대 세습’의 형태로 경영권의 승계가 이뤄지는 대기업 가운데선 아래 직급자를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일이 벌어진다. 주식회사인 기업은 공공의 것인데 사유물처럼 생각하니까 이런 행동을 거침없이 한다. 여기에 대해 ‘을’들이 느끼는 인격적 무시는 굉장히 크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인정투쟁은 계속될 것으로 보나.
“이런 방식으로 우리 사회가 민주화돼 가는 것이다. 권위나 권력은 비대칭적으로 나눠 가질 수밖에 없지만 인격이 훼손돼선 안 된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서 사회민주화와 관련한 계기적 사건이 계속 나올 것이다. 정치민주화와 경제민주화와는 또 다른, 혹은 대응하는 개념으로 사회민주화가 중요하게 여겨질 것으로 본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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