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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중학교 법정 가면 억울함 사라지고 생활 태도 좋아져요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학교에서 재판이 열린다? 학교와 학생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학생들이 발벗고 나섰습니다. 자치법정을 열어 잘못을 저지른 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학교측에 알맞은 지도요청을 한 것입니다. 학생들이 친구의 잘못을 평가하는 것은 선생님이 지도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제1회 학생자치법정 우수사례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용인 정평중학교에 다녀왔습니다.

정평중 자치법정에서 검사(성세은양·가운데)와 변호사(최민우양·서 있는 학생)가 벌이는 설전을 배심원단·판사·서기(왼쪽부터 시계방향)가 지켜보고 있다.

사건번호: 2014정평1

“지금부터 제1회 정평중학교 학생자치법정을 시작하겠습니다. ①과벌점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지난 12월 1일 정평중학교 방송실에서 자치법정 시연회가 열렸다.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벌점 사례를 바탕으로 가상의 과벌점자를 만들어 법정을 연 것이다. 3학년 이지혁군이 조끼미착용, 지각, 교사지시불이행으로 벌점 11점을 받아 재판에 회부되었다는 설정이다. 총 14명이 참석해 각자 과벌점자·검사·변호인·판사(3)·배심원(5)·증인·사무관·법정경위를 맡았다.

“진실만을 이야기하겠다”는 과벌점자의 선서와 함께 재판이 시작됐다. 검사를 맡은 성세은양이 과벌점자와 조끼미착용에 관한 질문을 주고받은 다음 판사에게 발언했다.

“이지혁 학생은 본인 부주의로 조끼를 분실하여 벌점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 구한 조끼가 작다는 핑계로 입지 않다가 다시 벌점을 받은 후 성실하게 착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벌점을 받기 전에도 조끼를 입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조끼미착용은 순간적인 실수가 아닌 본인의 선택이므로 그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변호를 맡은 최민우양은 과벌점자가 처한 상황과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강조하며 선처를 요구했다. “이 학생은 조끼를 분실한 후 잃어버린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 얻은 조끼가 몸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얼핏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편함을 참고 조끼를 입어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문제를 개선한 점에 주목해 선처를 부탁 드리는 바입니다.”

이어서 지각과 교사지시불이행에 관한 논의가 이어졌다. 검사와 변호인의 갈등이 격해질 때마다 판사가 중재에 나섰다. 증인으로 참석한 김규림양은 과벌점자가 벌점을 받을 당시 상황에 대해 진술했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검사는 과벌점자에게 벌점 11점 중 10점에 해당하는 ②교육처분을 내릴 것을 요청했다. 변호인은 학생의 긍정적인 변화를 감안해 벌점 11점 중 6점을 ③감경해 달라고 말했다. 과벌점자의 최종의견을 듣고 배심원 회의를 위해 휴식시간을 가졌다.

잠시 후 배심원 대표가 합의문을 발표했다.

“배심원단은 과벌점자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문제를 개선했다는 점, 잘못에 악의가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벌점 11점 중 5점을 감경했습니다. 남은 벌점 6점에 대한 교육처분은 기준표에 따라 다음 자치법정에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5점, 교복 단정히 입기 캠페인에 참여하는 것으로 1점을 감경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세 명의 판사는 잠시 대화를 나눈 뒤 결과를 발표했다. “학교 규정에 의거하여 배심원들의 평결이 충분한 논리적 근거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본 재판부는 배심원들의 평결을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20분 가량 이어진 재판은 그렇게 끝이 났다.

① 벌점을 많이 받은 사람. 정평중에서는 11~15점 사이를 기준으로 한다.
② 학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내리는 조치.
③ 줄여서 가볍게 하는 것.

1 방송부 학생들이 자치법정 시연회를 각 교실로 생중계하고 있다.
2 배심원(양지후양)이 작성한 기록지.
3 재판장(강창묵군·오른쪽)이 판결문을 낭독하는 모습.

화해를 위한 재판

학생자치법정이란 학생들이 스스로 판사·검사·변호사를 맡아 교칙을 위반한 학생에게 알맞은 조치를 취하는 활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시범운영을 시작해 현재 초·중·고 2700여 학교에서 시행 중이다. 정평중에서는 2012년 시작됐다. 처음에는 거부감을 나타내는 이들도 많았다. 학생은 재판정에 서는 것이 처벌 대상이 되는 것 같아 기피했고, 교사는 지도 역할을 내어주는 데 불만을 가졌다. 그러나 정평중 학생자치법정은 처벌이 아닌 용서와 화해에 비중을 둔 덕에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재판 결과 대다수 학생이 벌점을 감경받은데다 교사 지도보다 생활개선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법정은 학기마다 두 번씩, 1년에 네 번 열린다. 매회 세 명의 과벌점자를 선정해 재판에 출석을 요청한다. 재판 결과 벌점이 늘어나는 일은 없기 때문에 대부분 참석하는 편이다. 재판 2주 전부터 검사와 변호사가 과벌점자와 개별 면담을 한다. 변호사는 과벌점자의 이야기를 듣고 억울한 점이나 칭찬할만한 내용을 찾아 변론을 준비한다. 검사는 벌점을 받게 된 사실관계를 조사한다.

변호사와 달리 검사는 과벌점자의 잘못을 드러내기 때문에 학생들이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검사가 사실을 밝히는 것은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과벌점자를 보호하려 거짓으로 꾸며낸 판결을 학교측이 받아들일 리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검사는 과벌점자에게 솔직한 대답을 요구할 수 있다.

재판은 앞서 본 바와 같이 검사와 변호사가 각각의 벌점사유에 대해 발언을 주고받는 식으로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증거를 제출하거나 증인을 소환할 수 있다. 사전협의를 할 수 없어 예상치 못한 증거나 증인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최후발언이 끝나면 배심원단은 회의를 통해 합의문을 발표한다. 해당 학생에게 어떤 교육처분을 내릴지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참고해 판사가 최종 판결을 내리면, 학교측에 전달돼 학생지도에 그대로 반영된다. 진정한 학생자치의 실현인 셈이다.

학교와 학생 모두 만족

백상훈 지도교사

자치법정이 제자리를 잡으면서 학생뿐 아니라 교사들도 긍정적 효과를 누리고 있다. 벌점을 받는 학생의 불만이 줄고 태도 개선 사례가 늘었기 때문이다. 황연실 교장은 “교사는 모두를 공평하게 지도해야 하기 때문에 융통성이 없는 편이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두고 잘못한 학생을 예외 없이 처벌한다. 억울한 학생이 생겨도 어쩔 수 없다. 사정을 봐주는 것이 편애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아이들은 한 가지 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벌점을 받은 학생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들에게 위로를 받으며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다. 친구들 앞에서 개선을 약속하기 때문에 교육적인 효과도 크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사례를 묻자 백상훈 지도교사는 “화장을 해서 벌점을 받은 여학생이 재판 이후 더 이상 화장을 하지 않게 됐다. 예뻐 보이고 싶어서 화장을 했는데 친구들이 그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교복을 단정하게 입게 된 학생도 있고, 지각생을 체크하는 교육처분을 이행하다 더 이상 지각을 하지 않게 된 학생도 있다. 가장 긍정적인 사례는 교사가 증인으로 참석한 재판에서 학생과 오해가 풀려 돈독한 사이가 된 것이다. 이처럼 학생자치법정은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환영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시연에 참가한 학생 14명은 오는 19일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열리는 제1회 학생자치법정 우수사례 경연대회 시상식에서 법무부장관상과 함께 상금 150만원을 받는다. 지금껏 실시한 재판에서 대다수가 공감한 이야기들을 모아 가상의 사례를 구성한 것이 비결이란다. 전문가 못지않은 말솜씨는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 법질서선진화과에서 초빙한 강사에게 배운 것이다. 과벌점자 중 무서운 친구도 많을 텐데 재판에 부르기 껄끄럽지 않냐는 질문에 양지후양은 “그 친구들도 저희가 도움을 주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못되게 굴지 않아요. 재판 중 기분이 상해도 끝나고 다같이 회식하며 털어버려요”라고 답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속담은 잘못된 표현이다. 피치 못할 사정이나 안타까운 사연조차 변명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학생들이 “변명하지 마” 혹은 “말대답하지 마”라는 꾸지람에 눌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을 지 모른다. 학생자치법정에서는 핑계를 늘어놓아도 좋다. 억울하다 외칠 수도 있다.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한다”는 진지한 자세만 보여주면 된다. 지금부터라도 교실 속 숨은 법조인들을 찾아 나서는 것은 어떨까.

용인 정평중 학생자치법정 운영 과정

1 매년 봄 신입 멤버 선발(2014년 161명 지원, 15명 선발) → 2 오리엔테이션 및 워크샵 진행(자치법정 운영교육) → 3 과벌점자 선정 및 법정회부(학기당 2회) → 4 과벌점자 개별면담 및 재판준비(증인 및 배심원 선정) → 5 재판 및 회식 → 6 학교측에 결과 전달 → 7 과벌점자의 교육처분 이행 감시

글=김대원 인턴기자 , 사진=우상조 인턴기자

취재협조=황연실 교장, 이진한 교감, 백상훈 지도교사, 강창묵·김규림·김나영·김민수·김소현·박나은·박범수·성세은·양지후·이유진·이지혁·최민우·최승준·최지원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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