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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56〉 서울 천주교순례길 1코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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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다. 차분한 마음으로 한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해야 할 때가 왔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에도 좋고, 누군가와 함께 걸어도 좋은 서울 천주교순례길을 소개한다. 천주교 성지를 따라 서울 도심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닌다. 마침 올해가 한국 천주교회설립 230주년이고 지난 8월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도 방한했다. 이미 익숙했던 곳도 ‘순례지’라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새롭게 다가온다.

1코스(9.6㎞)는 명동대성당에서 시작해 종로~흥인지문~낙산성곽길~혜화동~가회동 성당으로 이어진다.

서울 천주교순례길 1코스는 우리나라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명동대성당에서 시작한다.

순교의 흔적이 서린 길

천주교순례길은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만든 길로 유명 성당과 순교지는 물론 조선시대 관청 터까지 포함돼있다. 코스는 모두 세 개다. 그 중 1코스 말씀의 길을 걸었다.

광화문과 종로는 조선시대 형벌을 관장하는 기관이 몰려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형조, 종각역 맞은편에 의금부, 광화문역 5번 출구(광화문우체국)에 우포도청, 종로3가 역에 좌포도청, 종각 맞은편에 전옥서(교도소)가 있었다. 큰 죄를 범한 사람들이 이 일대로 끌려와 재판과 처벌을 받았다. 천주교인에게 이 일대는 성지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되고 1886년 한-프랑스 통상조약이 체결돼 선교의 자유를 보장받기까지 약 100년간 수많은 천주교인이 광화문 등지에서 순교했다.

명례방 집회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광화문은 순교의 흔적이 서려있는 땅이죠.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처음 지정한 곳도, 수많은 신도와 신부님이 고문을 받다 돌아가신 곳도 여기였어요.” 김정자(60)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회 해설사의 설명이다.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에서 시복식을 한 것도 다 이런 의미가 있어서였다.

1코스는 명동대성당에서 시작했다. 블랑(Blanc Marie Jean Gustave·1844 ~1890) 주교는 명동대성당을 지을 때 기해·병인박해 순교자가 암매장된 용산 왜고개 성지에 있는 흙으로 벽돌을 빚어 사용했다. 명동대성당 지하에는 김대건(1821~1846) 신부를 포함한 성인 6명과 순교자 4명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출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곳도 이곳 유해실이다.

명동대성당을 빠져나오자 바로 명동거리와 만났다. 왁자지껄한 연말 분위기에 휩싸여 걸었다. 그 다음으로 향한 곳은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와 관련된 곳이었다. 외환은행 본점에는 장악원(掌樂院·궁중 음악과 무용 관리 관청) 표지석이 있는데, 이 근처에 한국 천주교 최초의 희생자 김범우(?~1786)의 집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승훈(1756~1801)의 친구 이벽(1754~1785)의 집터는 청계천 수표교 근처에 있다.

조선 말 남인 실학자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교리서 『천주실의』와 윤리서 『칠극』을 읽으면서 천주교를 접했다. 서양 학문으로 받아들이던 것을 종교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이벽이다. 이벽은 친구였던 이승훈이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가게 됐다는 사실을 듣고 이승훈에게 그곳에서 세례를 받으라고 했다. 이승훈은 1784년 세례를 받고 돌아와 중국에서 본 것처럼 이벽과 처남 정약용(1762~1836)에게 세례를 줬다. 이것이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이었다. 이벽의 집에서 모임을 갖던 교인들은 집회 장소를 명례방(명동의 옛 이름)에 있던 김범우의 집으로 옮겼다. 그러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모임이 발각(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됐고 이를 계기로 천주교가 세상에 알려졌다.

순교자들의 믿음을 느낄 수 있는 길

이벽의 집터를 지나고 종로거리에 들었다. 지하철 종로3가역 9번 출구(단성사 빌딩)가 좌포도청이 있던 곳이다. 천주교 신자들은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에서 심문을 받고 전옥서에 갇혔다. 양반이나 주교·신부는 의금부에서, 일반 평신도들은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된 사람 중 좌·우포도청에서 순교한 신자가 22명이나 됐다.

1 종로성당 지하에 있는 순교자 현양관. 2 흥인지문을 지나고 낙산성곽을 따라 걷는다. 3 한옥과 양옥이 어우러진 가회동 성당.

종묘옆 종로성당 지하 1층에 포도청 순교자 현양관을 둘러봤다. 1784년부터 1886년까지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73년) 같은 10번 이상의 박해가 있었는데 그때의 아픈 역사가 오롯이 기록돼 있다. 약 100년 동안 1만 여명이 순교했다고 한다.

흥인지문부터 혜화동까지는 낙산성곽길과 겹치는 구간이었다. 북적거리는 동대문종합시장과 평화시장 일대를 등지고 서있는 낙산은 이 일대 새로운 명소다. 성벽을 보수하고 야간 조명을 설치한 낙산공원은 동네 주민에게는 훌륭한 산책로가 되고, 연인에게는 좋은 데이트 장소로 꼽힌다. 서울을 조망하며 낙산성곽을 따라 내려오면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 도착한다. 성신교정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고 방학 기간에만 교정 일부를 공개한다. 12월 말 정도나 돼야 둘러볼 수 있다. 성신교정에는 김대건 신부의 두개골 유해가 안치돼 있는데, 직원과 동행해야만 볼 수 있다.

김대건은 최초의 한국인 신부다. 1836년 한국에 들어온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모방(Pierre-Philibert Maubant·1803~1839) 신부는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에 있는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그 중 한 명이 김대건 신부였다. 10년 동안 공부해서 사제로 임명돼 조선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13개월 만에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김정자 해설사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약 200군데에 모셔져 있다”며 “뼈를 조각 내 전국에 있는 본당과 성지에 나눠줬다”고 소개했다.

북적거리는 혜화동로터리, 높다란 담이 둘러쳐진 창경궁과 창덕궁을 지나 계동에 접어들었다. 옛 현대그룹 사옥을 끼고 우회전 하자마자 정겨운 골목길이 나타났다. 3층을 넘는 건물은 거의 없었다. 기와를 얹은 한옥이 대부분이었고, 30~40년은 돼보이는 빨간 벽돌 건물도 눈에 띄었다.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지나 중앙고등학교 정문까지 올라오면 오른 편에 우물이 하나 있다. 바로 석정보름우물이다. 이 우물은 우리나라에 입국한 최초의 신부인 주문모(1752~1801)와 관련이 있다. 1794년 조선 땅을 밟은 주 신부는 이 우물의 물을 세례수로 이용했단다.

1코스 종착점은 가회동 성당이다. 한옥이 밀집된 동네 분위기에 맞춰 전통양식과 서양식을 접목해 지었다. 처음에는 익숙한 길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하나 마지막에는 달랐다. 숭고한 죽음을 떠올리며 걷는 서울은 무척 낯설었다. 9.6㎞ 길 위에는 수많은 희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희생을 바탕으로 현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어느새 사위가 어두워졌다. 하루도, 한해도 그렇게 사그라지고 있었다.

●길 정보=서울 천주교순례길은 도심 한복판을 걷는다.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성당(명동대성당, 혜화동성당, 가회동성당, 중림동 약현성당)과 순교지(포도청 터, 서소문 순교성지, 당고개 순교성지, 왜고개 성지, 새남터 순교성지, 절두산 순교성지)를 연결해 만들었다. 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서울 명소도 지난다. 해서 국내인 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추천할 만하다. 코스는 모두 세 개다. 1코스 말씀의 길(9.6㎞)은 명동성당~낙산성곽길~기회동성당, 2코스 생명의 길(5.6㎞)은 가회동성당~덕수궁~중림동 약현성당, 3코스 일치의 길(13.1㎞)은 중림동 약현성당~새남터 순교성지~절두산 순교성지를 걷는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회(martyrs.or.kr) 홈페이지에 가면 상세 지도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02-2269-0413.

●걷기 여행길 포털 선정 ‘일출·일몰 성지 10’

‘이달의 추천 길’ 12월의 주제는 ‘일출·일몰·성지’이다. 차분한 마음으로 길을 걸으며 한해를 마무리 할 수 있는 트레일 10개가 선정됐다.<표 참조>

이달의 추천 길 상세 내용은 ‘대한민국 걷기여행길 종합안내 포털(koreatrails.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걷기여행길 포털은 전국 540개 트레일 1360여 개 코스의 정보를 구축한 국내 최대의 트레일 포털사이트로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한다.

글=홍지연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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