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과 키신저가 「아옌데」제거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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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70년 월남전당시 밀라이촌 학살사건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뉴욕타임즈지기자 「시머· 허시」가 「키신저」와 「닉슨」의 백악관 시절』이라는 부제가 달린 『권력의 댓가』라는 책을 내년초에 펴낸다.
다음은 40만단어에 달하는 이 책내용중 저자자신이 직접「아옌뎨」제거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 아틀랜틱지12월호에 기고한 내용이다. <편집자주>
「렘브런트·로빈슨」제독은 합참본부와 국가안보회의간의 연락장교로 그의 사무실은 매우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백악관의 최상급 기밀서류와 정보문서들이 모두 그의 사무실을 거쳐갔다.
「닉슨」의 국가안보담당특별보좌관이던 「키신저」는 「로빈슨」의 분별력과 충성심을 굳게 신임하고 있었다.
이때문에 「로빈슨」제독이 「키신저」와 「닉슨」이 함께 꾸민 칠레의「아옌데」대통령정권을 쓰러뜨리기위한 비밀작전에 깊이 관여하게 된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70년9월4일 칠레국민선거에서「살바도르·아옌데·고센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로빈슨」은 백악관의 특별지시에 따라 해군 하사관출신의 「찰즈·래드퍼드」라는 27세의 젊은이를 손수 픽업하여 선거 수주일후 칠레로 보냈다. 그에게는 여러가지 지령이 떨어졌고 이 가운데는 「아옌데」를 암살하도록 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뒤이어 전달된 지령서에는 『임무를 수행하는 여러가지 방안을 검토할 것』 이라고 되어있었다.
이같은 계획은 칠레선거직후 「닉슨」대롱령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칠레는 세계적 규모의 구리광산을 갖고 있었으나 이중 80%는 미국인 회사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이는 칠레 전수출고의 60%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거래하는 미국계 회사는 유명한 아나콘다와 케네코트구리회사 등이었다. 미국계 회사가 차지하는 이익도 엄청나 아나콘다는 60년대에 5억달러의 순이익을 올렸다.
미국정치가들의 눈으로 볼때 칠레의 가장 심각한 정치적 위험은 사회주의당의 대표격인「아옌데」였다. 그는 토지개혁과 주요산업의 국유화, 사회·공산주의국가들과의 유대강화,소득의 재분배등을 들고나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58년과 64년에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58년선거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호르헤·알레산드리·로드리게스」에게 불과 3%의 표차로 패배했다.
CIA(미중앙정보국)의 적극적인 협력에도 불구하고 「알레산드리」와 그의 국민당은 그후 6년간 계속 인기를 잃어 64년 선거는 과격파「아옌데」와 기독민주당을 대표하는 「에드와르도·프라이·몬탈바」의 대결로 압축됐다.
「프라이」의 정당 역시 친미적이어서 미국인들이 칠레에서 사업을 하는데는 「아옌데」의 연정보다는「프라이」가 당선되는 것이 훨씬 바람직했다.
64년 선거에서 미국의 개입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깊었다. 미국은 「프라이」를 지원하기 위해 2천만달러를 보냈다. 유권자 l인당 8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프라이」는 56%라는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됐다. 그의 승리에는「라틴아메리카·비즈니스·그룹」으로 알려진 미국회사들의 협조도 큰 도움이 됐다.
63년 「데이비드·록펠러」(체이스앤해턴 은행회장)에 의해 조직된 이 그룹은「카스트로」와 맞서 싸우던「존·케네디」대통령의 특별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아나콘다사의 「제이·파긴슨」회장, 국제전화전신회사(ITT)대표 「해럴드·지닌」, 펩시회사회장 「도널드· 켄들」 등도 포함되어있다. CIA나 비즈니스그룹이 칠레에서 활동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켄들」의 친구이자 보수파계열의 엘머큐리오신문 체인 소유자인 「어거스틴·에드워즈」였다. 그는「아옌데」와 좌파의 반대세력이었다.
CIA와 비즈니스그룹은 70년 선거직전에 아메리카위원회라는 새조직을 만들어 「에드워즈」를 통해 거액의 선거자금을 「프라이」에게 또다시 건네주었다.
「프라이」가 집권하는 동안 CIA는 마음대로 칠레전국을 휩쓸며 활동을 벌였으며 특히 과격파와 좌경세력를 억압하는데 주력했다. 64년부터 69년사이 최소한 CIA에의해 20개의 작전이 수행됐다는 것은 미상원조사에서도 밝혀진바 있다.
60년대말「프라이」정부와 CIA사이에는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CIA 산티아고지역 책임자인 「헨리·헤크셔」는「프라이」가 좌경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있는 것으로 분석, 미국정부에 「프라이」 대신 「알레산드리」로 대체할 것을 건의했다. 70년 선거가 가까와지자「프라이」는 「헤크셔」가 우려한 것처럼 더욱 좌경색채을 띠어 결국 69년말에는 쿠바와 통상거래관계를 맺기까지 했다.
「닉슨」 대통령은 이때문에 「프라이」를 몹시 못마땅해 했다. 「닉슨」이 「프라이」를 싫어 한 데는 또다른이유가 있었다. 「케네디」가 그를 키워놓았기 때문이다. 칠레주재대사「에드워드·콜리」도 「닉슨」의 미움을 샀다. 「콜리」는 63년 「케네디」에 의해 이디오피아대사에 임명됐으며 67년이후 칠레대사로 근무해왔었다. 68년12윌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된지 한달후 ClA는 칠레에 관한 특별보고서를 작성, 「닉슨」 에게 보고했다.
「닉슨」은 「프라이」에 대한 반감때문에 62∼69년사이 10억달러이상이던 칠레에 대한 원조를 감축하라고 지시했다.
70년 선거가 임박하자 아메리카위원회는 미국무성에 접근, 「알레산드리」의 선거캠폐인을 지원하도록 최소한 50만달러을 제공했다. 그러나 결과는 「아옌데」의 승리였다.
3백만유권자가운데 불과 3만9천명의 표차였다. ClA를 비롯한 미국정부의 절망은 측은할 정도였다.
선거전에서 패배한 미국의 다음 전략은 경제조치였다. 칠레에 대한 원조를 대폭 감축함으로써 「아옌데」를 곤궁에 몰아넣어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하자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이마저 「아옌데」를 축출하는 방안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해가 바뀌어 71년말쯤 되자 칠레군부안에 쿠데타음모설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아옌데」정부의 엄중한 감시때문에 활동이 위축된 CIA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보기관인 ASIS를 통해 군부의 움직임등을 면밀히 추적해달라고 요청했다.
71년 한햇동안 「닉슨」과 「키신저」가 칠레에서의 CIA활동비용으로 허용한 돈은 3백50만달러이상이며 73년 군사쿠데타의 성공으로「아옌데」가 피살 (혹은 자살한 것인지도 모르지만)될 때까지 CIA는 8백만달러를 썼다. CIA가 「아옌데」를 쓰러뜨린 쿠데타에 직접 가담했거나 「닉슨」 행정부가 제3국을 통한 방법등으로「아옌뎨」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물론 하나도엾다.
그러나 칠레에서는 워싱턴정부가 어떤 종류의 정권을 좋아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백악관이 「아옌데」 정권수립을 극력 반대하고나서 위험을 무톱쓰고「아옌데」당선을 방해한것은 각기 다른 동기가 있었다. 「닉슨」은 자신을 지지하는 이익집단의 인물들, 즉「제이·파긴슨」 「도널드·켄들」 「해럴드·지닌」등을 보호해주려 한것이고 「키신저」는 대통령을 만족스럽게 해주는것외에 그자신의 욕망-자신의 세계관과 신념을 관철시키려는데에 근본목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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