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가로수길인데 권리금이 없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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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1~2층 상가(130㎡, 이하 전용면적)에 들어선 유명 의류브랜드 직영 매장. 지난해 7월 세입자가 바뀌면서 월세가 5배 가까이로 올랐다. 이전에 잡화(1층)·표구점(2층)을 운영하던 세입자들은 매월 950만원(보증금 1억8000만원)을 냈지만 현재 월 4500만원(보증금 5억원)이다. 의류·휴대전화 업체간 입점 경쟁이 붙으면서 임대료가 확 올랐다. 반면 각각 9000만원, 3000만원이던 권리금은 사실상 사라졌다. 의류 매장이 입점하면서 권리금을 주지 않아서다. 인근 A공인 관계자는 “권리금을 내지 않는 조건으로 임대료를 올려주겠다고 하니 주인이 이전 세입자를 이사비 정도 주고 내보냈다”고 전했다.

 요즘 강남·명동 등 서울 주요 상권에서 임대료는 급등하는데 권리금은 떨어지는 이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개 상권이 활성화한 지역은 장사가 잘 돼 찾는 수요가 많고 임대료는 물론 권리금도 오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대기업이나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이 주요 상권을 장악하면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월세가 권리금보다 비싼 지역도 있다. 에프알인베스트먼트 조사에 따르면 서울 명동 99㎡형 1층 상가 평균 임대료는 보증금 6675만원에 월 8800만원이다. 2011년 12월 이후 3년 만에 월세가 1800만원 올라 20% 뛰었다. 반면 권리금은 되레 6% 하락한 8125만원으로, 월세보다 낮다.

 대형매장이 브랜드(회사) 홍보를 위해 비싼 월세를 내고 주요 입지를 차지하면서 임대료 수준이 확 높아진 영향이다. 반면 아직까지 관행으로 주고 받는 권리금은 지출 증빙이 어려워 대기업 등이 지급을 꺼린다. 콜드웰뱅커 케이리얼티 박대범 본부장은 “소규모 자영업자와 달리 법인 세입자는 원하는 입지에 입점하기 위해 높은 임대료를 제시하는 반면 영수증 처리가 되지 않는 권리금은 주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조적인 이유도 있다. 임대료와 권리금을 주고 받는 주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임대료는 세입자와 주인간 거래지만 권리금은 세입자와 세입자간 거래다. 주인이 비싼 임대료를 제시하면 자금 부담이 커지는 새 세입자는 권리금을 낮추려 든다. 이 과정에서 기존 세입자는 권리금을 제대로 챙기기 어려워진다. 에프알인베스트먼트 안민석 연구원은 “주인보다 약자인 기존 세입자가 권리금을 다 챙기겠다고 임대료를 내리라고 요구할 수는 없어 권리금을 손해보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소상공인이 설 자리는 더 좁아지고 있다.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중심 상권에서 밀려나고 권리금도 챙기지 못한다. 홍대입구 상권 1층 상가(40㎡)에서 수제 패션소품 가게를 운영하던 선모(42)씨는 올 초 8년 만에 가게를 비우고 인근 골목상권으로 이사했다.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상가주인에게 월세를 30% 올려주겠다고 나서면서 재계약에 실패했다. 선씨는 “우리같은 영세한 자영업자는 월세를 30%씩 올려줄 수 없어 이전 세입자에게 줬던 권리금 4000만원만 손해보고 가게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고 푸념했다.

 대형 매장이 수익성 악화 등을 이유로 문을 닫으면 상권 슬럼화 우려도 있다. 한국창업부동산정보원 권강수 이사는 “개성 있는 중소형 매장이 비싼 임대료에 밀려나면서 상권 특색이 사라진 데다 덩치 큰 상가 수요층은 한정적이라 쪼개 임대 놓더라도 상권이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최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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