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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이란사태 인질444일(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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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나는「사이」(「밴스」국무), 「데이비드」(「애런」국가안보자문위부위원장), 「조던」(비서실장)을 불러 이란측 반응을 논의했다. 「바니-사드르」는 인질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신호를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보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이란 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게될 2월26일까지는 기다려보라고 했다)「바니-사드르」는 「고트브자데」를 곧 바꿔칠 생각이라고 말했다).「바니-사드르」는 자신이 『미국의 친구』라거나 『중도파』로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고 있다.
그는 두 초강국(주=미·소)들의 위협으로부터 이란의 국가이익을 지키고 있는 「혁명투사」로 자신이 인식되기를 바랐다. 우리는 이란에 대한 우리의 다각적인 통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일기 1980년2월4일>
미국대사관이 점거된 이래 우리에겐 가장 고무적인 사태발전이 있었다. 「호메이니」는 이란사람들을 미국인과 더불어 말도 나누지 못하게 했지만 이란대통령은 나와 함께 인질의 석방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니-사드르」는 자신의 계획을 혁명위원회의 위원들에게는 비밀에 붙이고 있었으나 「고트브자데」외상은 이 계획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미국의 가장 큰 희망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정치적 힘을 강화하기를 바랐다.
-「조던」이 이란에 파견된 「그의 사람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 미국의 밀사들은 이란 땅에 들어간 뒤 「고트브자데」외상과 4번이나 주기적으로 만났다. 그들은 「바니-사드르」와도 두 차례 만났으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약간 사소한 문제들이 발생했는데 후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다각 비밀통로 유지>
우리의 밀사들이 지난 3, 4일간 잠을 한숨도 못자 혁명위원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 그들은 우리와 연락을 끊고 계속 잠자리에 떨어져 있었다. 이란혁명위원회가 끝나자 「바니-사드르」가 새로운 의장이 됐다는 발표가 나왔다. <일기 1980년 2월5일>
「바니-사드르」는 이란 과격파들을 일반대중들로부터 소외시키고 인질범들의 영웅심리를 숨죽이려는 취지의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의 연설이 인질석방을 위한 포석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그의 연설내용을 흥미있게 검토했다. 인질석방에 조금이라도 차질을 빚을까봐 우리는 교섭진 내용을 일체 비밀에 붙여야만 했다.
이런 속사정을 알리가 없는 미국시민들은 석방이 늦어지고 교섭에 아무런 진전이 없다며 차츰 분노를 더해갔다.
미국의 동맹국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영국·캐나다·호주·이집트·파나마는 항상 우리를 도와주었지만 다른 나라들은 말썽을 부리기만 했다.
서독의 「헬무트·슈미트」수상은 영국이 우리를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소련이나 이란에 대한 어떤 제재도 반대한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입장은 오락가락했다. 우리는 공동보조를 모색하기 위해 서방선진 경제정상회담에 참가하는 7개국 외상들의 회담을 개최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란, 혁위도 따돌려>
우리는 「부르게」와 「비알론」이 닦아놓은 터전 위에 우리의 계획을 계속 밀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바니-사드르」대통령과의 교섭을 공식화시킬 셈으로 「밴스」를 뉴욕에 보내 「발트하임」총장과 만나 유엔대표단을 다시 이란에 파견하는 문제를 협의하도록 했다. 유엔대표단의 이란방문 준비는 테헤란에 있는 두 사람의 프랑스외교관이 맡았다. 나는 정확한 문서를 마련해 마지막 순간에 혹 있을지도 모를 미국-이란간의 오해를 사전에 예방하고자 했다.
나는 무엇보다 이란측이 당초에 표명했던 입장을 바꿀 움직임이어서 몹시 기뻤다. 이란 측은 그때까지 「샤」의 송환과 그의 재산압류를 요구해왔으며 미국인질을 스파이로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위협했을 뿐 아니라 국제회의에서 계속 미국을 비난하는 입장을 고수했었다. 그러나 이 무렵 이란측과 진행했던 협상과정에선 이러한 주장들이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
이란과 미국은 이제 일을 해결할 채비를 갖춘 셈이었다. 이란 측은 국제기구의 관계자들이 인질전원을 방문하는데 동의했고 「바니-사드르」대통령은 미-이란이 어떤 합의에 도달만하면 인질을 48시간이내에 석방할 것이라고 말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호메이니」가 이러한 계획을 승인했다는 「바니-사드르」의 발언이었다. 나는 인질이 석방만 된다면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유연성을 보이려했었다. 그러나 인질이 이란 땅을 떠나는 절차상의 문제를 놓고 약간의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란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부르게」를 통해 미국 측 대표를 파리에서 만나자고 제의해 왔다.
나는 「조던」비서실장을 파견했다(주=「카터」는 이 회고록에서 「조던」이 만난 상대를 밝히지 않았으나 「조던」은 그의 저서 『위기』에서 상대방이「고트브자데」외상이었다고 말했다). 이란 측은 국무성을 통하지 않는「직접거래」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후 파리에서 돌아온 「조던」을 맞느라고 나는 딸 「에이미」의 첫 바이얼린 독주회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조던」의 보고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서둔감도 있었으나 그리 실망스런 내용은 아니었다. 그의 보고는 이 고통스런 한 겨울동안 내가 받았던 가장 고무적인 내용이었다.
미국시민들은 몇 달 전에 비해 나를 보다 지지하긴 했지만 갖가지 국제적 위기를 해결하는데는 우리 행정부가 무능하다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란혁명이 일어난 이래 국제원유가격은 두배로 뛰었고 인플레이션의 압력은 계속 우리를 괴롭혔다.

<세부사항 양보키로>
곧 이어 동계올림픽이 개최됐다. 동계올림픽의 하이라이트는 막강한 소련 팀과 무명의 미국 팀간의 아이스하키 경기였다. 젊은 미국 팀이 소련을 꺾고 승리를 거둔 이 경기야말로 내 생애에 영원히 잊지 못할 한 추억이 되고있다.
-나는 즉각 미국 아이스하키 팀의 「허브·브룩스」코치에게 전화를 걸어 승리를 축하한 다음 코치 및 선수전원을 오는 월요일에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브룩스」코치는 여름에 모스크바에서 개최예정인 하계올림픽에 미국이 불참하기로 한 내 결정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요일 아침에 핀란드와의 마지막 게임을 남겨놓고 있었는데 이제 미국 아이스 하키 팀은 금메달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일기1980년2월22일>
나는 미국 아이스하키 팀이 소련에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앞으로 인질문제가 잘 풀릴 전조라고 희망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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