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단 표방…북괴주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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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전향을 선언한 정재준씨 (전 재일 거류민단 동경 본부단장) 가 부의장으로 있던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일본 본부」(한민통) 는 전 민단 중앙단장 김재화(78·전 신민당전국구 국회의원) 등이 중심 이 돼 75년 8월15일 결성된 반한 단체다.
이 단체의 핵심 요원은 의장인 김과 전향한 정씨 외에 김용원 (68·부의장·전 민단경도지방 본부단장) 배동호 (73·상임고문·전 민단중앙 사무총장) 곽동의 (52·사무총장·한층 위원장) 등이다. 이들은 67년 김재화가 조총련 자금수수 사건으로 구속되자 반정부활동을 표면화했다.
이어 71년7월 민단조직을 근본적으로 와해시킬 셈으로 극렬 반한 단체인 이른바 베트콩파 (민단유지 간담회)를 주축으로 반민단 청년·학생을 동원, 민단동경본부를 습격하여 민단에서 제명되자 노골적으로 친 북괴세력으로 등장했다.
72년 7·4공동성명이 발표되자 곽동의·배동호 등이 중심 이 돼 남북회담에 임하는 북괴전략에 맞춰 이른바「민족통일협의회」를 결성하여 북괴통일 노선에 영합하여 선전활동을 해왔다. 곽동의 등은 이에 앞서 64년 8월 조총련 주최 밀봉 학습회에 참석해 재일 북괴 교육기관인 조선대학 교수들로부터 남한을 인민혁명으로 적화통일 하라는 지령을 받고 실행에 옮길 것을 서약까지 했었다.
고 육영수 여사 저격범인 문세광도 이 한민통 산하조직인 구「한청」회원이었다. 한민통은 73년8월 발기대회를 갖고 75년에 정식 발족 된 이래 ▲주한미군철수 ▲「카터」대통령 방한반대 (단식투쟁 및 뉴욕타임즈에 「카터」방한 반대광고 게재·78년4월) ▲김대중 구출 1백만명 서명운동 등을 벌여 왔다.
한민통은 미국과 유럽에 있는 반한 단체들과 제휴해 77년8월 「민주민족통일 해외한국인연합」(한민련)을 구성하기도 했다. 한민통은 73년 발기대회에서 대통령 선거에 낙선한 뒤 일본에서 망명정부 수립 등을 주장했던 김대중을 의장에 추대하기도 했다.
특히 한민통의 핵심인물인 곽동의는 70년4월 일본에서 북괴로 몰래가 간첩교육을 받고 일본내 반한 혁명 단체결성지령을 받았었다. 한민통의 운영자금은 곽과 배동호 등이 북괴와 조총련으로부터 받아 왔음이 드러났다. 우리 대법원은 이에 따라 78년6월13일 한민통이 북괴의 지령에 의해 조직됐으며, 김재화(현의장) 등이 조총련의 지령을 받고 조총련과 공동으로 활동한 증거가 드러났다고 판시, 반 국가단체로 판결했다.
이와 같이 한민통의 북괴와의 관련이 밝혀지자 77년9월부터 간부들이 전향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전향한 이가 김대중 구출위 부위원장이며 한민통 중앙위원인 나종경씨 이며, 한민통 기관지인 민족시보 편집위원 이기우, 한민통 전 부의장 민영상씨등 19명이 한민통을 이탈했다.
이번에 전향한 정재준씨는 배동호·곽동의 등과 함께 한민통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한국정부규탄집회 단식투쟁 등을 주도했고, 그 동안 6억엔 이상을 한민통에 희사한 사람이다.
이처럼 주요역할을 해온 정씨가 한민통을 떠남으로써 이 조직은 사실상 허물어지게 됐다. 【동경=신성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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