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천재와 범재의 경쟁 제대로 못 보여줘 찜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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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이재규 PD

▶ 패션 70s

▶ 다모

바짝 깎은 머리를 은색으로 물들인 이재규(35)PD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지난 3월 SBS '패션 70s'촬영을 시작하면서 '열심히 하자'는 의미로 삭발한 머리에, 열흘 전 마지막 회 촬영을 앞두고 '새로운 맘으로 하자'는 뜻에서 염색을 했단다). 두 번째 작품 '패션70s'가 폐인까지 양산한 데뷔작 '다모'의 부담을 딛고 시청률 30%를 넘기며 선전했으니 그럴 수밖에. 그래도 그는 '서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첫 작품 히트 후 두 번째 작품은 기대에 못 미치는 현상)'를 깬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 "징크스 못 깼어요. 아쉬운 점 투성이라니까요"라며 '엄살'을 부렸다.

-어떤 점이 가장 아쉬운가.

"천재성을 타고난 더미(이요원)와 평범하게 태어난 준희(김민정)의 극한까지 간 경쟁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미흡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게 된 준희의 정체성 갈등도 의도만큼 드러내지 못했다. 다만 시청자들에게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이란 게 주어지는 것이냐, 만들어가는 것이냐에 대한 생각을 던져주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왜 욕심대로 만들지 못했나.

"시간이 없었다. 3월 촬영을 시작했는데도 5월 첫 방송이 되기 전에 5회밖에 만들지 못한 상태였다. 그 뒤론 4, 5일에 한 회씩 만들어냈다. 특히 연장방송을 둘러싸고 남은 분량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제작을 해야 했던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래도 이야기의 기본 골격이 연장방송 때문에 바뀌지는 않았다. 하지만 순발력과 순간적인 집중력이 미덕이 되는 현실이 슬프다(그가 비교적 만족스러워하는 '다모'는 거의 사전제작 방식으로 만들었다)."

-그런 난관에도 흥행에 성공한 요인이라면.

"'대진운'이 좋았다. 아이돌 스타가 나오는 트렌디 드라마와 맞붙었으면 시청률이 어땠을지 장담할 수 없다. 특히 비.고소영 주연으로 시작하려고 했던 MBC '못된 사랑'이 무산되면서 그 덕을 본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더미와 동영(주진모)이 처음 만나는 맹골도 신이다. 맹골도는 서울에서 자동차로 6시간을 달려 전남 진도로 가서 40분 배를 타고 조도에 간 다음 또 배를 2시간 더 타야 도착하는 작은 섬이다. 헬기가 나오는 장면을 찍다가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 헬기가 뒤집힐 뻔한 적도 있었다. 진짜 고생했다."

-'수훈갑' 연기자는.

"이요원씨다. 담백하고 진지한 연기가 만족스러웠다. 아역 배우들도 다들 애썼다. 특히 빈(천정명) 아역을 맡은 은원재는 트럭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찍다 양쪽 팔목이 부러져 깁스를 한 상태에서 한 달 넘게 촬영을 계속했고, 더미 아역의 변주연은 '잠 좀 자게 해주세요'라며 애원할 정도로 힘들어하면서도 연기를 제대로 해냈다."

-영화 같은 영상으로 화제가 됐는데.

"'뒤바꾼 운명'이라는 설정이 아주 새로운 게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운 비주얼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2'에 사용된 것과 같은 카메라인 소니 시네알타 F900을 썼고, 70년대라는 시대 배경을 그려내기 위해 어둡고 무거운 화면을 일부러 택했다."

-지난해 김종학 프로덕션으로 옮긴 이유는.

"항간에 돈 때문이라는 얘기도 많은데, 돈 때문이라면 왜 안정된 직장을 버렸겠는가. 아내도 'MBC에 있으면 정년 퇴임할 때까지 25억원은 벌 수 있는데 왜 나가냐'며 결사 반대했다. 독립한 진짜 이유는 육식 동물인 인간이 초식동물처럼 무리지어 살아서는 본연의 야성을 잃어버리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어떤 작품을 하고 싶나.

"경쾌하고 밝은 코믹 드라마에 푹 빠져 즐겁게 일해보고 싶다. 아니면 원래 내가 쭉 해오려고 했던 잠수부 형제의 이야기를 담은 아쿠아 드라마를 하든지. '다모' 이후 드라마 만드는 데 매달리느라 영화나 DVD도 많이 못 보고 있다. 계속 이렇게 살면 아둔해지는 건 시간문제겠다."

글=이지영, 사진=최정동 기자

■ 이재규 PD는 …

1970년생. 서울 충암고와 서울대 신문학과를 졸업한 뒤 96년 MBC에 입사했다. '보고 또 보고''국희''아줌마' 등의 조연출을 거쳐 2003년 퓨전사극 '다모'로 스타 PD의 반열에 올랐다. 지난해 8월 MBC를 퇴사해 김종학 프로덕션으로 둥지를 옮겼다. 대학 1학년 때 만난 김지연(34)씨와 97년 결혼, 일곱 살.다섯 살 남매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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