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공격대장의「고줌바캉」 등정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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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전인미답의 처녀봉 고줌바캉(7천8백6m) 정상을 1백여m 남겨놓고 공격대장 김영한(36·대전자일클럽)은 2시간째 사투를 벌여야했다.
고줌바캉(봉) - 에베레스트 북서쪽 30m지점 초유봉(8천1백53m) 과카충캉(7천9백22m)사이에 끼어 앉은 그 처녀봉은 발아래 히말라야 최대의 고줌바 빙하를 둘러치고 지금껏 아무에게도 등정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지난2일 하오5시30분(현지시간) 이미 해는 기울었고 김영한은 하산을 생각해야할 만큼 쫓기고 있었다.
제 4캠프(7천2백60m)를 출발한 상오7시반부터 눈속에 감춰진 빙벽에 픽스로프를 설치하는 동작을 되풀이하는데만 10시간 이상을 보낸 셈이다.
고줌바는 끝내 우리를 거부할 것인가.
김영한은 이를 악물었다.
눈물을 머금고 네팔인 셰르파「도리우지」와 「앙켄젠」에게 선두를 내주면서 자신의 명예보다는 충청인의 긍지를 생각했다. 「인간이 산을 정복하는게 아니라 산이 인간에게 등정을 허용하는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이때처럼 절실해 본적이 없었다.
『정복이 아닙니다.』 빙벽에 매달린 김영한은 고줌바 정상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발 뿌리치지 마십시오. 당신의 품에 태극기를 안기고자 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마침내 고줌바는 2명의 네팔인 셰르파에 이어 김영한을 그녀의 심장위에 우뚝 설 수 있도록 가슴을 내주고 말았다.
하오6시10분(현지시간) 고줌바 정상에 달이 뜨고 있었고, 짙푸른 달빛에 채색된 채 드러나는 세계의 지붕」티베트의 하늘이 찬란하게 김영한의 발아래 펼쳐지기 시작했다.
당초 5년여의 준비기간을 끝낸 대전자일클럽이 네팔 관광성당국에 등반허가 신청을 접수 시킨게 81년5월.
이어 6월25일 처녀봉 등정의 관례대로 네팔국과 합동등반대를 결성하는 조인식을 가졌다.
네팔-한국 고줌바캉합동 등반대가 캐러맨을 시작한게 9월9일, 초유 캠프를 거쳐 해발5천2백m 고지의 베이스캠프 도착이 9월30일이었다.
10월5일에 제1캠프(5천7백m) 16일에 제2캠프(6천4백50m), 27일에 제3캠프(7천m)를 설치했을 때는 이미 적설량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겨울철로 접어들어 등반기한에 쫓기고 있었다.
서둘러 31일에 마지막 전진기지 제4캠프(7천2백60m)를 확보하고 이튿날부터 정상공격에 들어가야만 하는 초읽기에 물렸었다.
비록 1차 공격에는 실패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픽스로프만 5천m를 깔아야 했던 전구간 빙벽클라이밍이라는 난관을 뚫고 마침내 초등정복에 성공하고만 것이다.
고줌바캉1은 네팔당국의 오랜 동결로 지금껏 신비함을 간직해오다가 76년에 해금, 77년 일본의 세계적인 등반가「우에무라·나오미」가 도전에 나섰다가 2봉으로 진로를 바꿨다.
이어 79년 일본 등반대가 본격 등반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미답봉으로 남아 있다가 금년 9윌9일 네팔당국의 의도적인 배려로 네팔·프랑스합동 등반대와 네팔·한국합동등반대가 동시에 출발,
그러나 프랑스등반대는 10월17일 장비 및 기술부족으로 제 3캠프를 끝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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