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환호」도 목숨과 바꿀 순 없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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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김득구 선수의 충격은 프로복서계에 커다란 충격을 던진 채 많은 이들의 가슴에 적지 않은 「할말」들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로복서 아내들은 누군가는 패해야만 하는, 피비린내 나는 약육강식의 링 위에서 활약하는 남편을 지켜보면서 조금씩 「돈」과 「갈채」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한다. 프로복서 남편을 둔 이들의 애환을 들어본다.
▲정=시합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이렇게 김득구 선수의 현실로 접하고 보니 남편 김 선수의 지나간 복싱시절이 다시금 살아납니다.
아무리 해도 해도 살아올 수 없는 몸이지만 정말 다시 태어난다해도 복싱선수와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생각만이 회고될 뿐입니다.
▲유=미국을 떠나기 전에 김 선수가 집에 찾아와서는 『귀국해서 꼭 술 한잔하자』고 다짐했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더군요. 마치 남편 정 선수일인 것 같아 비통한 심정을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정=남편 박 선수가 참담해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복싱 선수의 아내라는 입장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습니다.
더구나 저는 결혼당시만 해도 은퇴한 박 선수의 아내였는데 이제는 재기한 현직 아내라는 입장이어서 더욱 불안하기만 합니다.
집요하게 복싱세계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박 선수에게 이렇게 안타까운 만류의 심정을 어떻게 이해시킬지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정=남편과 결혼 약속을 한 60년대에는 프로고 아마추어고 간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전혀 없었던 종목이 복싱이어서 여자관람객은 무조건 무료였습니다. 그때 복싱을 보았으면 물론 결혼을 재고해 보았겠지만 약혼을 한 후 처음으로 복싱 경기를 보면서 「바로 이 자리가 내 남편이 서 있어야하는 자리구나」라는 생각이 미치자 눈물이 한없이 쏟아지며 한스럽기 그지없더군요.
▲정=박 선수와 결혼말이 오가자 모두들 부러워했습니다. 더구나 친정 아버님께서 열렬한 박 선수의 팬이었던터라 아무런 장애 없이 결혼을 치렀습니다만 막상 재기말이 나오자 가장 적극적으로 만류한 장본인이 바로 저이기도 합니다. 「돈」과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도 생명과는 바꿀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유=정 선수의 경기를 제대로 본적이 단 한번도 없을뿐더러 경기 예정일이 다가오면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그래도 결과가 궁금해 순간순간 TV를 켜 보면서 가슴 죄다가 막상 인터뷰를 하는 정 선수를 보면「이겼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지만 승자나 패자나 느끼는 감정은 비슷했습니다. 「맞지 않는 권투」를 복싱선수의 아내가 희망하지만 결국 맞을 수밖에 없는 세계가 링의 세계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정=13년 동안 선수생활을 한 김 선수를 지켜보면서 운동에 지장이 없도록 살림살이만은 어떻게든 부담 지우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남편과 가정의 모든 일을 의논하는 것이 아내의 도리이긴 해도 즐거운 일은 남편에게 얘기할 수 있어도 궂은 일은 행여 운동에 방해가 될까싶어 모든 일을 제가 꾸려가야 했을 정도니까요.
▲정=새벽5시만 되면 아침운동을 시작하는 박 선수의 붕대와 운동복을 챙겨주면서 자고 먹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즐거움이면서도 그를 참아야 하는 운동선수들의 고통을 생각해봅니다. 「한번 보았으면 했던 스타」를 이제 남편으로 맞이한 제가 9개월 된 아들에게 『권투선수는 네 아빠 혼자만으로 충분하다』고 다짐합니다.
▲유=시합날을 받아두고부터는 본격적인 긴장감이 가정에 맴들아 6개월 된 첫아기의 울음이 행여 신경을 건드릴까봐 품안에서 차마 떼어놓지도 못합니다. 체중조절 때문에 기본 음식은 물론 물 한 모금도 입에 삼켰다가는 뱉는 정 선수를 보면서 복싱 선수를 시킬 수 없는 딸아이를 낳은 것에 오히려 안도감을 가질 정도입니다.
▲정=먹고 싶은 것 제대로 못 먹고 자고 싶은데 제대로 못 자면서 피땀 흘린 선수생활을 유치원에 다니는 큰딸아이에게 더 크기 전에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겠다며 아기아빠가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생명까지 건 선수시절의 노력이라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으로 성실하게 살아보았습니다. 하다 못해 아이들에게도 맞는 사람이 되라고 교육시켜온 것도 권투 선수의 아들이기에 행여 『주먹장이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TV경기를 보는 것과 달리 실제 경기장에서 권투경기를 보면 핏방울이 링 바닥에 흥건하고 3, 4회전만 넘기면 얼굴 전체가 부어오릅니다. 게다가 관중들의 시선은 예리해 시합 후 받은 갖가지 평은 상당한 절망을 안겨주기도 하고 훅 시합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시합 후 내내 참담해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노라면 그저 송구스럽습니다.
▲유=집념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김득구 선수에게서 보면서 무엇보다 시간관념과 영양분섭취에 신경을 쓰기로 했습니다. 「잘 해야되겠다」는 의욕과 「무섭다」는 부담감을 덜어주는 것이 바로 가정의 안락에서 해소되도록 해야하니까요.
▲정=한번은 극성스런 여자 팬이 링에 올라가 꽃다발을 바치는데 링사이드에 앉아 있는 저만 쳐다보면서 기어이 꽃다발을 거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시합을 하면서도 상대편 선수보다도 제 표정만 쳐다보는 남편을 보면서 의아스럽게만 했는데 알고 보니 「괜히 부인에게 미안했다」는 감정 때문이었다더군요. 아마 그 건실한 정신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믿을 수 있는 지주가 된 듯 합니다. 경제사정이 모두 어려운 복서들에게 한창 힘쓸 나이에 후원을 해주는 것이 죽은 다음에 수만명의 애도보다 더욱 절실할 것 같습니다.
▲유=머리가 아프다는 소리만 들으면 겁이 덜컥 나는 저희들로서는 시합에 졌을 때도 성원해주는. 대중들의 격려가 아쉽기만 합니다.
「레너드」부인이 단 한 회의 링에 들어오는 억대의 돈을 마다했듯이 돈만으로 프로복서의 세계에 몰입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정=유능한 선수 남편을 기대하는 만큼 가정의 안정을 지켜주는 것이 바로 권투선수 아내가 해야할 임무인 것 같습니다.
2, 3개월동안 집을 비우더라도 이해하고 양보하면서 명예나 욕심도 포기할 줄 알아야한다는 진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원로급 선배들의 부인들이 모두 심장병을 비롯, 갖가지 잔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링 위의 남편은 이미 대중의 남성으로서 받아들여야하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리 육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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