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1)제79화 육사졸업생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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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학병출신 장군>
아시아 각지의 전선에 흩어져 있던 4천3백여명의 우리 학병들은 8·15 일본투항소식을 듣고는 만주에서, 중국에서, 남양군도에서, 그리고 일본과 국내에서 귀국과 상경을 서둘렀다.
조국에 돌아온 숫자는 대략 3천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그중 2천여명이 남한으로 왔다.
의식수준이 높았던 이들은 이데올로기 문제에도 민감하여 해방 후에는 좌익계의 학병동맹 (위원장 안익권)과 우익의 학병단(총사령 안동준, 개편 후엔 위원장 김완룡)으로 갈려 대립하다가 창군작업이 시작되자 학병단계의 1백10여명이 군에 들어갔다.
그중 40여명이 군영, 나머지는 각기에 흩어져 있다가 건국 후에 모집된 7기 특별반에 대거 입교했다.
대장급 6명(민기식 김종오 김계원 김용배 한신 백석주) 외에도 중장으로는 군영출신의 전 국방장관 박병권(연전·논산태생)·전 국방차관·국회의원 김종갑(연전·서산)·전 국회의원 김형일(서울법전·경기 화성·작고), 군단장을 지낸 김익렬(고오베고상·하동), 전 국방장관 최영희(일본 전수대), 전 군단장·1군부사령관 최석(와세다대·함남 북청·작고), 5·16당시의 육군참모총장 장도영(동양대·재미), 전 교통부장관·국회의원 민병권(일본중앙대·황해 사리원), 주영대사이며 정치학 박사인 강영동(만주 건국대·평북 창성), 5·16이후 세 차례의 내무장관과 체신·교통부장관·국회의원을 역임한 박경원(나가사끼고상·전남 영광) 장군이 있다.
육사2기가 된 학병출신 중장으로는 전 체신부장관 박원근(일본대 경제학부·인천), 전 육사교장 김희덕(만주신경법대·창령), 전 통일원차관 이규학(동양대·경북 예천) 장군이 있고 『7특』출신 학병 중장으로는 국회부의장·농림장관·무임소장관을 역임한 장경정(동양대·전북김제·경희대 명예박사), 전 국방차관 조문환(서울법전·비둘기부대장), 「8특」으로는 전 마사회장 임지순(경성고상·충남 부여) 중장이 있다. 이상만 따져도 22명에 별이 78개다. 그러나 학병출신의 장성진출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트랜스아시아사 부사장으로 있다가 미국으로 이주한 임선하 소장(군영·명치대·함남 영흥), 한국 안전기업사장 황헌시 준장(군영·와세다대·함북 온성), 5·16때 재무장관을 지낸 삼호주택 회장 백선진 소장(군영·동지대·평양), 주택공사 사장 강신탁 소장(8기·일본체전·경북상주), 스웨덴 대사 등을 거쳐 광업협회장을 하고 있는 방희 소장(7특·만주 건국대·서울), 전 서울시립대학장 박중윤 소장(7특·만주건국대·황해 장연), 변호사로 활약중인 김정구 준장(법무3기·보전·충북 청원), 내외통신사장 이욱근 준장(일본중앙대법과·8특·정훈l기·평북 정주), 전 종무처 차관 최택원 소장(동경대·5기·신의주), 변호사이며 의료기제조업을 하는 홍필용 준장(명치대·법무1기·평남 순천), 전 전북·경북지사 김인 준장(7특·하까다 공업학교·상주), 전 법무장관·국회의원 장형정 준장(보전법과·충남 청양) 등도 모두 학병출신으로 국군에 들어와 장군이 된 분들로서 예편해서는 각기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는 분들이다.
이미 작고했지만 심언봉 준장(진전·군영) 오덕준 소장(일본 관서대·군영·군단장)과 군의 보도·정훈을 맡다가 예편 후 문인으로 활약한 김종문 소장(동경 아테네 프랑세학교) 등도 학병을 거쳐 장성이 된 분들이다.
학병이라는 엘리트집단은 국군의 스타 박스라 할만큼 장성을 대량 산출해 냈을 뿐만 아니라 군의 질을 높이고 활력을 불어넣는데도 중요한 요소가 됐다.
이들은 고등교육을 받았고 군사경험을 이미 구비하고 있는데다 영어에도 능숙하여 해방 후 초창기 우리국군에는 딱 들어맞는 적성을 가지고 있어 유리한 점이 많았다. 특히 당시의 미군 실무자·고문관들이 중위·대위들로서 연령이 우리 학병 출신들과 비슷해 서로들 잘 어울리고 반죽도 잘 맞았다.
특히 한국에 진주한 미 시군단은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일본 증오심이 컸던 만큼 강제 동원된 학병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지고 우대한 것 같다.
이런 배경과 사정으로 해서 미군이 추도하던 창군작업에 학병들의 존재는 금방 눈에 띄어 표면에 부상케 된 것이다.
학병단은 대표를 미군정청에 보내 유창한 영어와 애국적인 열의로 미군장교들과 당당히 따지고 토론하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임선하 소장 같은 이는 즉시 미군에 발탁되어 국군의 산실이라 불렸던 군정청(지금의 중앙청) 203호실 보좌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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