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2030 일터에서

당신이 보잉 상무라고? "내 딸과 비슷한 나이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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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 상무님 부탁합니다"/"전데요"/"(조금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홍보 담당 김 상무님요"/"제가 홍보 담당 김지희 상무입니다."

몇 초 동안 썰렁한 침묵이 흐른다. "어, 여자분이셨네…."

보잉에 근무하기 시작한 2년 전부터 자주 겪었던 전화 통화다. 지금도 가끔 이런 전화를 받는다. 오히려 전화로 할 때는 나은 편이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보잉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김지희입니다. 잘 부탁 올립니다"라며 명함을 내밀면 상대방 시선은 십중팔구 명함과 얼굴을 여러 번 오고 간다. 그 얼굴에는 젊은 여성이 다국적 기업의 상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든 표정이 읽힌다.

"실례지만 몇 살이에요?"

"내 딸이랑 비슷하네…."

"보잉은 여자한테 관대하네…."

"젊은 여성이 빨리 출세했네…."

그래도 이런 반응은 양반이다. 면전에서 상대방을 무시하는 듯한 질문을 노골적으로 하는 분도 적지 않다. 29세 군수업체 홍보 담당 상무를 맡고 있는 나에 대한 보편적인 반응들이다.

항공이나 우주, 군수업계 하면 으레 남자들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업무적으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젊은 여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으며 호기심을 표시한다. 보잉에 처음 입사했을 때 초면에 이런 질문을 받으면 속이 상했다. 더구나 보잉사는 항공.군수 업체여서 업무의 특성상 접촉을 해야 하는 분이 대부분 남자다. 게다가 잦은 야근, 해외 출장까지 빈번해 여자들이 감당해 내기 어려운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난 2년간 함께 근무하는 보잉사의 동료로부터는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 면접을 볼 때나 처음 입사해 업무상 전 세계의 많은 보잉 직원과 함께 일하고 교육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내 직급과 나이 혹은 성별을 따지지 않았다. 실제로 전 세계 보잉 직원 중에는 뛰어난 여성이 많은데 이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에 와서는 딴판이다. 여기서도 업무상 외국인들과 만날 기회가 많은데 그들 역시 내가 여자라는 점, 상대적으로 어리다는 점에 놀라움을 표시하거나 명함과 내 얼굴을 여러 번 번갈아 쳐다본다거나, 나의 연령을 묻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유독 한국 남자들만 '그렇게 젊은 나이에 어떻게, 혹은 여자가 어떻게'라는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인지 어떤 분은 초면에 반말을 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아예 미국식으로 "매기"라고 부르는 분도 있다. 젊은 여자니까 그렇게 불러도 개의치 말라는 표정이다. 공평하지 못한 건 그분들이 다른 남자 임원에겐 꼬박꼬박 직함을 부르면서 나에게만 유독 "Maggie"라는 나의 영문 이름을 고집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자란 나에겐 '여기가 한국이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경험들이다. 그나마 시간이 갈수록 호감을 갖고 잘해 주는 사람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떤 다국적 기업을 보더라도 남자가 해야 하는 일과 여자가 해야 하는 일을 구분하지 않는다. 누가 더 적극적으로 일하고 누가 더 많은 성과를 거두느냐를 따질 뿐이다. 한국 기업들이 유능한 한국 여성들을 차별할수록 외국계 기업들이 뛰어난 여성 인력을 차지할 공산이 크다. 이것은 한국 입장에서 보았을 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만 살펴보더라도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임원에 오른 경우도 여러 명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한국 기업보다 외국 기업에서 일하는 게 마음이 편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고 있다면, 그리고 선진국 도약을 꿈꾼다면 여성 인력 활용 방안을 새롭게 모색하는 것이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물론 편견 없는 동등한 기회 부여와 결과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무엇보다 중요한 관건이다. 그러려면 상대방이 젊은 여성이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하는 것은 기본이 아닐까. 어느덧 나도 반말을 듣는 것에 상당한 면역이 생겨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김지희(보잉코리아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