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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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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금은 천원짜리 지폐의 모델로 가장 흔한 초상화의 주인공이 돼버렸지만 퇴계 이황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초상을 그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터럭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곧 다른 사람(一毫不似 便是他人)'이라는 원칙 때문이었다. 그것은 왕과 대소신료는 물론 일반 사대부들조차 앞다퉈 그렸던 조선시대 초상화의 기본 정신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초상화가 거울처럼 모사해야 한다는 건 아니었다. 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그릴 때도 외모 묘사는 7할이면 족했다. 나머지는 대상 인물의 인품이나 성격.학식.업적 등 내면 세계로 채워 넣었다.

그것이 전신사조(傳神寫照) 화법이다. 중국 화가 고개지는 육조시대에 이미 알아차렸다. 겉모습을 묘사하되 그 속에 숨어있는 정신까지 표현해낸다는 것. 그래야만 살아있는 초상이 된다는 걸 말이다.

전신사조를 설명하는 좋은 일화가 있다. 영조 때 병조참판을 지낸 문인화가 강세황이 자화상을 그렸다. 서양화처럼 명암을 넣어 움푹 파인 볼과 깊은 주름의 입체감을 살렸는데도 영 낯선 사람 같았다 한다. 그런데 17세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화가 임희수가 얼굴에 붓질을 몇 번 하자 땅을 칠 정도로 닮게 되었다. 임희수의 천재성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강세황이 스스로 자기 인품을 그려넣기 남세스러웠던 까닭이었으리라.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아는 초상화 중 유관순 열사의 영정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새로 그리기로 한 모양이다. 작가의 과거 행적 문제를 떠나 영정이 너무 나이 들어 보이고 수심 깊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유관순의 얼굴이 보다 갸름하고 청초했다는 증언도 있고 사진도 있다.

잘못을 바로잡는 건 옳다. 그렇다고 유관순의 얼굴을 지나치게 미화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유관순은 뜨개질을 좋아하던 활달한 소녀가 아니다.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유일한 슬픔"이라던 열사의 얼굴에서 수심과 단호함은 사라질 수 없다. 나라 잃은 치욕을 못 이겨 자결한 우국지사 황현의 초상(채용신 작)이 사팔뜨기로 남아있어 그 정신이 더욱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전신사조가 잘 반영된 새 유관순 영정을 기대해 본다. 경술국치 95주년이 되는 날, 떠올려 본 단상이다.

이훈범 주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