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신경성 현기증(2)|마음과 현대인의 병|이시형<고려병원 정신신경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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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선 어지럼증이 있으면 그게 곧 빈혈 때문에 오는 걸로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좀 유식한 환자들은 현기증을 아예 빈혈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옛날 이야기다.
우리도 잘살게 된 오늘날 영양실조나 기생충으로 인해 오는 빈혈이 현기증의 원인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먹지 못해 오는「저 헤모글로빈 증」은 오늘에 와선 살아진지 오래다.
한마디로 어지럼증을 빈혈로 부르던 가난한 시대는 지나갔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어지럼환자가 많다는 사실이다. 현기증의 의학적 규명은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뇌 기능의 이상·혈당치·혈압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긴 하지만 사실 이런「진성 현기증」환자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임상에서 보는 환자의 대다수는 정신적 원인에서 오는 심인성 현기증이다.
충격적인 뉴스를 들었을 땐 우린 누구나 순간적으로 아찔함을 느낀다. 아들의 전사소식을 들은 엄마는 어지럽다 못해 쓰리 지기도 한다. 높은 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일상 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 이런 현기증은 모두가 순간적인 정신적 긴장·불안에 연유한다. 어지러워 못살겠다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사실상 이런 정신적 불안이 현기증의 원인이다.
불안의 원인을 정확히 찾아내 근본적인 해결을 하든지, 아니면 이를 잘 다스려야 현기증이 치료된다는 건 불문가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현기증이 오면 곧「영양 부실이다」「뇌빈혈이다」등 자가진단을 붙여 뇌신경 강화 제니, 뇌혈관 촉진제니 하고 전혀 근거 없는 치료를 하고 있다. 보약을 지어먹고 살만 쪄서 나중엔 진짜 상대성 현기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철분이 모자란다고 비타민 등과 함께 무조건 복용하다 보면 현기증 치료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병만 얻는다. 이게 모두「현기증=빈혈」이라고 생각하는 무지에서 출발한다.
현기증은 불안의 한 증상이다. 팔 다리 힙이 빠지고, 기억도 잘 안 되고, 정신이 멍한 등의 이런 증상 등과 함께 오는 현기증이라면 원흉은 불안이다.
현기증의 정신적 원인으로서는 우울증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환자자신이 정서적으로 우울하다고 느끼는 건 아니다. 만사가 귀찮고, 밖에 나가고 싶지 않고 사람을 기피하는 등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울증을 알 수 있다.
어지러워 밖에 못 나간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울증 때문에 현기증이 온 경우다. 매사에 패기가 없고 권태로운 증상이 동반되는 현기증의 예외 없는 원인은 우울증이다. 따라서 우 울의 정신적 원인을 찾아 치료하고 또 항울 제를 써야 만이 치료가 가능하다.
정신적 원인의 다음 형태는 전환 신경증의 한 형태로 나타난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운동장이나 파티장소 등에서 어지럽다고 쓰러지는 환자다. 공부가 싫은 학생이나 갈등이 많은 여자에게서 흔히 잘 나타나는 중상으로써 상세한 정신의학적 면담과 정신치료를 받아야 완치 가능한 환자다. 어쨌든 어지럼증은 마음이 어지러워서 오는 병이란 걸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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