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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진보당 사건(4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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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주당과 진보당의 정·부통령후보 단일화협상은 4월27일의 신익희-조봉암 회담의 결렬로 표면상 벽에 부딪친 듯 했다. 그러나 발표와는 달리 이면에선 사실상 단일화 협상은「원칙적인 합의」가 성립돼 있었다.
그간의 협상과정에서 진보당은 민주당 측 부통령후보 사퇴 외에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진보당의 기본정책 즉 ▲책임정치의 구현 ▲수탈 없는 경제체제의 확립▲평화통일 추구라는 3개항 기본정책을 민주당의 집권공약에 반영해 달라는 것.

<조병옥 등 제외 요구>
여기에 곁들여 진보당 측은 과거문제도 들춰냈다. 즉 2년 전 민주당 창당운동 때 민주대동이란 지표를 세우고도 죽 산과 그 계열을 신당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일을 사과하고 앞으로는 죽산 계열에 대해 공산당이라는 모해를 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할 것과 민주당이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후 죽산 기피의 장본인인 조병옥·김준연 두 사람은 정부요직에 등용치 않는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타진이 그것.
신익희-조봉암 간의 비밀회담에선 이들 문제가 토의됐고 두 사람은 합의를 성립시켰다. 합의 내용은 ①진보당은 창당의 기반을 넓히기 위해 5월초까지 지방유세를 계속한다. ②그 기간 막후교섭을 통해 민주당은 진보당 측 조건을 수락하고 진보당은 후보사퇴를 할 수 있는 당내 분위기를 조성한다. ③5월초 신-조 회담을 열고 공동성명을 통해 후보단일화를 발표한다는 내용.
이리하여 표면상 민주·진보 양당후보들은 모두 지방유세에 나선 가운데 막후교섭이 비밀리에 진행됐다. 그에 관한 박진목씨의 증언.
『정화암·장건상씨 그리고 병 보석 중이던 이영근씨(조봉암 농림장관 때의 비서·현 통일일보 사장)등 이 모두 죽산에게 대통령후보를 사퇴하라고 건의했습니다. 나는 죽산 계열이었지만 해공의 사위 김재호씨, 장남 신하균씨 와는 가까와 양쪽을 오가며 연락을 한 셈이지요. 어느 날엔 가 해공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나는 죽산과의 약속을 지킨다. 우리 당내에서 죽산을 공산주의자라고 한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내가 얘들(아들과 사위)앞에서 정략으로 거짓말을 하겠는가.> 그래서 다음날 서상일씨를 만나 해공의 얘기를 전했더니 그 내용을 서약서로 만들어 오라고 해요. 그래서<제가 어떻게 해공 선생께 서약서를 쓰라고 얘기를 합니까. 선생께서 해공을 만나서 다짐을 받으십시오>라고 했지요. 그 며칠 뒤 신익희-서상일 회담이 있었고 여기에서 합의가 됐었지요.』

<경찰, 지방유세 방해>
막후 교섭의 진전을 반영하듯 민주당의 조병옥 최고위원도 5월초 성명을 통해『야당의 단일 대통령 후보교섭에 나의 거취가 장애가 된 모양인데 필요하다면 민주당 최고의원 자리도 내놓겠다』는 성명을 냈다.
이리하여 야망의 대통령후보를 단일화하는 신익희-조봉암 회담은 5월6일 전주에서 열리기로 예정됐다.
해공은 5월5일 전주에서 유세를 갖고 죽산은 광주를 거쳐 전주로 오도록 일 정이 짜여져 있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5월5일 해공의 갑각스런 서거로 백지화되고 말았다.
이에 관한 신도성씨의 증언.
『4월 중순부터 지방유세에 나갔었다. 경남-북을 거쳐 5월5일 광주에 도착해 유세를 하고 전주로가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와 회담할 예정이었다. 5일 광주근교에 이르렀는데 파출소 앞에 차단기를 설치해 우리 자동차를 막았다. 그때는 연유를 몰랐는데 나중에야 해공 서거 때문임을 알았다. 우리가 광주에 도착해 고려호텔로 들어갔더니 호텔주인이 해공의 서거소식을 전해 주었다. 당시 민주당 관계자들은 진보당이 호남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어 해공에게 호남유세라는 강행군을 시켰다고 얘기했지만 전혀 사실과 다르다. 우리는 그때 막 호남유세를 시작할 참이었고 유세보다는 해공과 회담하고 진보당의 정·부통령 후보사퇴를 발표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호텔 방에 들어가 사태변화에 따른 대책을 논의했다. 죽산은 <후보사퇴가 필요 없게 됐으니 선거운동에 마지막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지금부터는 선거운동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벌써 파출소에서 우리를 막지 않습디까. 이제부터는 대통령당선이 문제가 아니라 신변의 안전이 염려됩니다. 유세는 나 혼자 할 테니까 죽산 선생은 서울에 가서 은신해 있어야 것입니다.> 결국 내 의견이 채택되어 죽산은 곧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나는 유세를 계속했는데 군산유세에 나갔더니 청중이 없었다. 이때부터 경찰이 우리들의 선거방해에 나선 것이다.』
진보당의 조직부차장이던 안경득씨도 신씨의 증언을 뒷받침해 이렇게 회고했다.
『죽산이 지방유세를 떠난 뒤 서상일씨가 신익희씨와 접촉했다. 5월4일 아침 서상일씨가 나를 부르더니 한통의 편지를 주면서 전주로 내려가 죽산에게 이 편지를 전하라고 했다. 편지는 해공과의 교섭과정을 쓴 내용으로 죽산의 후보사퇴였다. 나는 해공이 타고 가던 같은 야간열차에 타고 있었다. 결국 해공이 서거하고 죽산도 곧바로 서울로 가 버려 전하지는 못했지만….』해공의 서거로 죽산은 야당의 단일 대통령후보가 됐다. 이제 남은 일은 민주당의 조봉암 지지 약속을 받아 내는 일이었다. 진보당은 야당단일후보교섭은 원칙합의가 이미 끝나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민주당의 결단을 촉구했다.
『지난 4월29일 서상일씨가 대구에 내려가 조봉암·박기출 두 후보에게 해공과의 협의 내용을 통보했다. 이 자리에서 진보당이 정·부통령 후보를 민주당에 양보하기로 하고 늦어도 선거일 1주일전인 5월8일 이전에 후보사퇴를 공표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 그때 공개된 합의 내용.
특히 서씨는 이런 합의를 발표할 신익희-조봉암 회담의 날자와 시간을 죽산에게 알리기 위해 4일 안경득 조직부차장을 죽산에게 특파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사전 합의실을 애써 외면했다.
진보당 측이 후보사퇴를 거부했기 때문에 해공은 무리한 선거운동을 강행해야 했고 이것이 급작스런 서거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서 오히려 화살을 진보당 측에 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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