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포럼

국정원장 김승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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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미국 중앙정보국(CIA) 본부의 현관 입구에 새겨진 글이다. 죄에 빠졌으면서 자기는 회개할 게 없다고 우기는 유대인 특권층, 도그마와 위선의 인간들에게 예수가 했던 발언이다. 신약 성경(요한복음 8장32절)에 기록돼 있다. 진리는 인정하는 것만으로 자유의 기쁨을 선사한다. CIA는 이 새김글에서 미국의 자유를 위한 정보활동의 고귀함을 강조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도 정보의 가치는 진실에서 나온다는 깨달음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는 경구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김승규 국정원장은 이 성경 구절이 새삼스러울 것이다. 그는 요즘 진실의 경계선 위에 섰다.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에서 휴대전화 도청이 있었다"는 8월 5일의 진실 고백이 세 방면에서 공격받고 있다. 너무 강한 진실이 관련자들에게 부담을 줬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의 근처에 가 본 사람일수록 진실을 대면하길 꺼리는 경향이 있다.

우선, 진실 고백을 지시했던 노무현 대통령이다. 노 대통령은 김승규 원장의 고백 발표 1주일 전인 7월 29일 DJ 정부에서의 휴대전화 도청 사실을 보고받았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단순명쾌했다. '우리가 감춘다고 이게 감춰질 일입니까. 여기에 간여한 사람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제2, 제3의 공운영 팀장이 과연 없겠어요? 숨김없이 발표하세요'라는 취지가 전달됐다. 예상되는 파장에 대한 검토도 있었다. '전직 국정원장들과 현재 여권의 주요 인사가 다칠 수 있다'는 보고에 노 대통령은 "그래도 할 수 없지"라고 답변했다는 것이다. 그랬던 노 대통령이 18일 언론사 정치부장들과 만났을 때 "(김대중)정권이 책임질 만한 그런 과오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김 전 대통령과 호남 표를 의식하는 '정치인 노무현'의 이중적 얼굴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국가 범죄의 진실을 드러내려는 힘겨운 조사가 진행되는 중이다. 끝이 어디인지는 조사를 하는 국정원도 수사를 하는 검찰도 모른다. 노 대통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진실의 행진을 DJ 앞에서 멈추게 하려 하는가. 김승규 원장은 7월 29일 들었던 '대통령 노무현'의 지침을 따르기 바란다. 18일 '정치인 노무현'의 발언은 그저 립서비스 정도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둘째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종찬.임동원.신건씨 등 전직 국정원장들이다. 이 세 명의 전직 원장이 김승규 원장을 불러냈다. 이들은 'DJ시대에도 도청이 있었다'는 김 원장의 발표가 번복되지 않는 한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조사 대상자가 조사 책임자를 만나 집단으로 압력을 행사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직들이 엄연하게 드러난 휴대전화 도청에 시인도, 사과도, 용서도 구하지 않은 것은 비겁하다. 그들은 모든 허물과 비난과 책임을 고스란히 조직과 부하들에게 돌리고 있다. 김승규 원장은 도청 진실을 고백하는 발표문에서 "상명하복이 생명과도 같은 정보기관의 속성상 상사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휴대전화 도청) 직원들의 고충을 헤아려 달라"고 호소했다. 그런데 '상명'과 '상사'의 정점들은 '보고받은 적도, 지시한 적도 없다'고 발뺌한다. 국정원의 많은 직원이 전직 원장들의 비겁과 책임 전가에 울분을 토하는 이유다.

셋째는 과거 고문이 당연시될 때처럼 '도청, 그거 좀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정원의 전.현직 일부 실무 세력이다. 이들은 죄의식이 없기에 진실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김 원장의 진실규명 노력을 비웃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방해한다.

김 원장은 진실을 대면하기 싫어하는 세 종류의 정신과 싸우고 있다. 정치적 고려와 전직의 비겁과 불법의 습관들이다. 이 타락한 정신들이 취임한 지 50일도 안 된 김승규 원장을 위협하거나 회유하고 있다. 김 원장이 멈추면 진실도 주춤할 것이다. 김 원장이 움직이면 진실의 경계는 확장될 것이다. 김승규의 힘은 8월 5일 그의 최초 발표에 있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