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주먹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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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주먹눈' 전동균(1962~ )

그래도 첫 마음은 잊지 말자고

또박또박 백지 위에 만년필로 쓰는 밤

지나가는 흐린 그림자들 추억처럼

지나가는 창문을 때리며

퍼붓는 주먹눈, 눈발 속에

소주병을 든 金宗三이 걸어와

불쑥, 언 손을 내민다

어 추워, 오늘 같은 밤에 무슨

빌어먹을 짓이야, 술 한 잔하고

뒷산 지붕도 없는 까치집에

나뭇잎이라도 몇 장 덮어줘, 그게 시야!


시인은 모름지기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 대해서도 사랑과 연민의 감정을 그 누구보다 앞서 예민하게 자신의 것으로 감각할 줄 알아야 한다. 잉크가 어는 겨울 밤. 시인은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를 쓰기 위해 또박또박, 첫 마음으로 돌아가 백지를 채워나간다. 그러다 불현듯 작고 시인 김종삼을 떠올린다. 시를 억지로 짓지 말게나, 까치집에 나뭇잎 몇 장 덮어주는 게 시일세 하는 환청과 함께.

이재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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