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진우의 저구마을 편지] 배추꽃처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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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노란 빛으로 흐드러지게 피었던 배추꽃이 따가운 봄볕에 다 지더니 씨가 맺혔습니다. 김장에 쓰고 남아 꽃 보려 남겨놓은 배추였습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금방 튀어나올 듯 잘 영글었네요. 배추는 씨 하나에서 시작해 배추가 되었다가 꽃을 피우고 다시 씨를 맺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가지요.

가족을 위해 헌신해 온 아버지는 제가 못마땅했습니다. 글 쓴다며 부모를 봉양할 생각도 않고 제 식솔도 제대로 못 먹여 살리는 저를 늘 꾸짖었습니다. 그렇게 자기 삶에 무책임한 사람이 어찌 좋은 글을 쓰겠느냐고 호통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글 쓰는 사람은 돈에 욕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제 가족은 가난했습니다.

배추꽃의 한해살이를 보며 저라는 사람, 배추만도 못한 사람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저를 낳아준 부모와 형제, 제가 낳은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사는 게 글보다 중요하다 여기게 되었지요. 저도 가족을 위해 땀 흘리며 일하는 다른 사람처럼 씨앗이 되어 땅에 묻히렵니다. 늦었지만 온 힘을 다해 가족의 행복을 꽃 피워 보겠습니다.

*** '저구마을 편지' 마칩니다

추신- 세상에 널린 행복은 모두 남의 것,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보십시오. 먼 데서가 아니라 아주 가까운 데서부터요. 그리고 지난 석달 동안 이 남루한 편지를 읽어주시고 격려를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이 사람, 더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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