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회 문건은 예언록? 김기춘 빼고 현실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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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회 동향’ 문건의 가려진 내용들이 잇따라 공개되면서 문건의 진위를 둘러싼 논란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 문건이 지난달 28일 세계일보에 보도됐을 때는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 교체설 부분만 공개됐다. 정씨가 청와대 3인방(이재만 총무·정호성 제1부속·안봉근 제2부속 비서관)을 포함한 ‘십상시(十常侍)’ 송년 모임에서 “김기춘 실장은 ‘검찰 다잡기’가 끝나면 그만두게 할 예정이다. 시점은 2014년 초중순”이라고 언급했다는 것이었다. 이어 “정보지와 일부 언론에서 ‘바람잡기’를 할 수 있도록 유포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나와 있다. 다른 내용은 모두 검은색으로 가려졌다.

 그러나 청와대가 자체적으로 파악한 결과 김 실장 관련 언급 바로 밑에는 이정현 (당시 홍보수석) 의원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정씨가 “이 수석이 제 역할을 못하니 비리나 문제점을 찾아내 쫓아내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어 당시 김덕중 국세청장에 대한 불만이 제기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김 청장이 장악력이 부족하다”는 등의 발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정씨 발언’ 내용들에 대해 청와대는 “찌라시를 모아놓은 수준”이란 입장이다. 이에 대해 정치권과 정부 일각에서는 “다소 시간차가 있었지만 김 실장 교체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실현된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김 실장의 경우 지난해 말부터 ‘교체설’이 정보지에 유포되기 시작했다. 지난 1월 하순에는 “김 실장 사표 제출”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스위스 다보스 포럼 참석을 위해 출국하기 전 김 실장이 직접 사표를 제출했고, 박 대통령은 반려하지 않고 ‘귀국 후 보자’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

 지난해 8월 정무수석에서 자리를 옮긴 이 전 홍보수석의 경우 지난 3월부터 ‘광주시장 차출설’이 돌기 시작했다. 본인이 극구 부인하면서 루머로 끝나고 말았지만 지방선거가 끝난 직후인 6월 7일 갑자기 사의를 표명했다. 배경을 놓고 추측이 무성한 가운데 7·30 재·보선 선거에서 전남 순천-곡성에 출마하는 쪽으로 정리됐다. 결국 선거에서 이기며 금의환향했지만 당시만 해도 “호남이어서 생환이 어렵지 않느냐”는 회의론이 많았다. 이정현 의원은 본지 통화에서 “조작된 문건에 내 이름이 어떤 식으로 적혀 있는지에 대해선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김 전 국세청장의 경우 박 대통령 취임 후 내부 승진 케이스로 발탁돼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7월 24일 임환수 후임 국세청장 내정이 발표되면서 사임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지방 세무서를 순시했다는 점에서 예상치 못한 인사라는 평이 나왔다.

 청와대 측은 오히려 이러한 내용들이 문건의 신빙성을 의심케 하는 결정적인 근거라고 주장한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 전 수석과 함께 일한 음종환 홍보수석실 행정관을 가리키며 이 전 수석을 쫓아내라는 지시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김 전 청장 교체설에 대해서도 “6월 중순 최경환 부총리가 취임하면서 경제팀을 일신하기 위한 인사였다”고 설명했다.

 문건의 진위에 대한 검찰 수사는 곧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박관천 경정이 작성한 문건에서 ‘비선실세’로 지목된 정윤회씨와 청와대 비서진 등의 통신기록에 대한 분석이 끝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은 지난해 10월 이후 최근까지 정씨와 비서관 등이 발·수신한 통화나 문자메시지 내용 등을 확보했다. 문건에 모임 장소로 지목된 서울 강남의 J중식당 인근 휴대전화 기지국의 접속기록도 확보해 동일 시점에 정씨와 비서관 등의 접속기록이 겹치는지도 확인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객관적 증거로 모임의 실체 여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현철·윤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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